[이은혜의 책 사이로 달리다] 폭력의 피해, 주인 없는 경험이 되지 않도록

2021. 4. 6.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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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내게 고교 시절 1년은 기억하기 힘든 공백으로 남아 있다. 졸업식에 가지 않았고, 졸업 후 그 시절 학우들과는 인연을 잇지 않았다. 그곳은 내가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곳이며, 28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기억을 다시 마주할 용기를 낼 수 있다.

원고 읽는 일이 직업인 나는 수많은 역사적, 사회적 사건들을 간접 경험으로 안다. 가령 가정폭력이나 장애인 차별과 같은 것을. 반면 학교폭력은 피해 당사자다. 마틴 제이는 ‘경험의 노래들’에서 인간의 경험에 대한 사유를 총체적으로 다루는 가운데, “그가 경험한 바를 정말로 아는 사람은 오직 경험 주체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고교 시절 학교폭력 피해자로서 나는 많이 맞진 않고 발길질을 당한 정도였다. 하지만 가족을 비난하거나 파괴하는 말을 많이 들었고, 학창 시절 가장 중요한 자산인 ‘시간’을 빼앗겼다. 협박을 당했고, 강제로 많이 먹게 됐으며, 참고서를 압수당했다. 이건 가해자 입장에서 말을 바꿔 보자면 신체 폭력이 그리 심하지 않았고, 사랑한다는 말도 많이 했기 때문에 거친 말들은 그로 인해 중화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할 수 있다. 상대를 구속한 것은 우정을 쌓기 위함이었고, 많이 먹인 것은 맛있는 걸 나누기 위함이었다고 말해질 위험이 있다.

폭력에서 벗어난 후로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꺼낸 적은 극히 드물다. 지인들이 이 경험을 알게 되는 경우 나는 “트라우마가 없다. 고통을 지워서 일상에 지장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3~4년 전 유럽 여행 중 이 일이 갑자기 떠올라 괴로웠고, 1년 전 어떤 사건의 범인에 대해 지인이 ‘범죄자들도 한 명의 괜찮은 인간일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격한 언쟁을 벌이면서 아직 내 속의 상처가 깊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최근 몇 달간 학교폭력 기사를 매일 접하면서 그 고통을 다시 느끼고 가해자들이 나오는 TV나 영화, 광고는 쳐다볼 수 없게 됐다.

거의 다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도처에 이를 상기시키는 계기들은 평생에 걸쳐 무작위로 주어진다. 피해자는 이럴 때 ‘분노’ ‘망각’ ‘용서’라는 단어를 차례로 떠올리게 된다. 그냥 잊어버리자, 용서하면 편해지지 않을까 등등. 하지만 용서까지 도달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쉬이 잊히지 않는 강렬한 경험의 속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가해자로부터 사과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폭력의 경험은 질기게 살아남아 결국 피해 입은 자가 입을 열어 말하게 한다. 말이나 글로 자신의 경험과 정면으로 마주하면 나아질까 해서다. 사람들은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서술하기’의 작업에 많은 시간을 쏟아붓고 있다. 이때 위험한 것은 사회가 그 일을 별것 아닌 듯 치부해 경험 당사자의 말이 사회에서 거부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재진술이 좌절된 주체들은 “주인 없는 경험”을 지닌 이가 돼 버려 트라우마를 겪을 위험성이 높아진다.

열네 살 때 엄마에게 버림받은 작가 스베냐 플라스퓔러는 ‘조금 불편한 용서’에서 자식을 버린 엄마의 의무 방기에 대해 ‘용서’를 할지 평생 고민했다. “나는 엄마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 설명도 사과도.” 그러면 용서한 것이냐고 여동생이 묻자 작가는 “용서… 거창한 말이다”라고 털어놓는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이해한다고 무조건 용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과거를 등진 채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발명, 발견하려 한다. 하지만 피해자에게는 유독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유령이 있다. 그 유령은 과거의 일이 아닌 현재의 위력이 돼 피해자를 사로잡는다. 특히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가 없을 때 그 유령은 계속 출몰한다. 고(故) 권승민군의 어머니가 지금도 고통을 겪는 것처럼. 과연 최근 밝혀진 학교폭력의 가해자들 중 수치스러워하며 굴욕과 참회를 감당하려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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