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구는 대한민국이 종주국인 국민 스포츠입니다"

김재현 2021. 4. 5.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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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대 대구시족구협회 고문
이용대 대구시족구협회 고문이 국내 족구 역사과 발전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재현 기자

족구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민족의 놀이문화에서 발전된 대한민국이 종주국인 구기종목이다. 우리나라는 배구 경기장에서 네트를 하단으로 내리고 변형된 족구경기를 하게 됐고, 국군체육대회와 공기업이나 산업체에서 근로자들이 족구를 하면서 점차 보급되기 시작했다. 현재의 족구가 있기까지는 전국족구단체를 결성, 운영하고 모든 규칙을 제정하고 체계적인 발전에 헌신한 족구인들이 노력이 있었다. 이용대 대구시족구협회 고문을 만나 국내 족구 발전의 역사와 흐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족구가 구기 종목 스포츠 중 유일하게 대한민국이 종주국이라는데.

오늘 날 족구발전의 기초는 90년도 대한족구협회가 출범하면서 종목단체 조직이 결성되면서 현대식 족구가 출발했다. 일부에서는 1968년 공군에서 근무하던 안택수 대위가 국군체육대회에 족구경기를 하기 위해 족구규칙을 만들어 경기를 했다고 해 공군에서 창안됐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국군체육대회에서 족구를 하기 훨씬 이전에도 공기업과 산업체에서 직장인들이 활발하게 족구를 했다. 특정집단과 사람이 창안을 했다는 것은 허구다.

-족구경기의 통일된 규칙은 언제부터 적용됐는가.

1990년도에 대한족구협회가 출범하고 각 지역을 대표하는 족구인들로 구성된 ‘경기규칙심의위원회’가 발족했다. 전국 각 지역에서 적용하던 규칙을 모두 검토하고 2년여에 걸쳐 현재 적용되는 통일된 족구규칙을 만들었다. 당시 함께 했던 위원들이 사실상 현대족구의 출발에 기여한 족구인들이다.

-유사종목 단체들과 갈등도 많았다 들었다.

세팍타크로 단체에서 '극동식 족구'라는 명칭을 붙이고 족구를 변형시키는 행위를 하다가 정통 족구인들과 분쟁이 있었다. 결국 세팍타크로 측에서 족구는 완전히 다른 종목임을 인정했다. 이후 대한족구협회 조직으로 운영이 됐다. 몇 년 전부터는 풋넷이라는 유사종목에 족구종목을 들러리로 참가시키거나 유사종목을 족구대회장에서 경기를 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족구는 민족구기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세계적인 종목으로 발전시켜야 가치가 있는 것이지 유사종목과 뒤섞이면 안 된다.

-족구원로인 이용대 고문은 초대 최초라는 수식어로 많이 붙는다.

90년도 대한족구협회를 결성 당시 대구경북협회장을 맡았다. 당시 근무하던 기업이 있었던 달성군이 1995년에 대구시로 편입되면서 97년에 대구시족구협회를 창립, 초대회장을 맡았다. 1999년 대구시생활체육회 정식단체로 인준을 받고 초대회장을 역임했고, 전국조직에서 족구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지도자회를 만들어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용대 대구시족구협회 고문.

-족구 활동은 언제부터 했는가.

1980년 공기업인 대한중석에 입사를 하면서부터 족구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게 됐다. 88서울올림픽이후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 높아질 때 삼성, 현대, 대우 등 그룹형태의 모든 기업체에서 직장 내에서 족구를 하였기에 자연스럽게 교류를 하게 됐다.

-족구방송도 이용대 고문님이 최초로 시작했다고 하는데.

2001년 3~9월 MBC의 족구방송경기를 주최 주관해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정규방송의 족구경기가 중계됐다. 경기 방영시간대도 황금시간인 매주 금요일 저녁 7시였다. 덕분에 전국민이 족구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다. 당시 족구마왕전이라고 경기 명칭을 정하고 다른 종목 선수 4명과 족구선수 1명이 붙는 1대4 족구경기를 했는데, 어떤 종목의 선수들도 족구선수 1명을 이기지 못했다.

-전국족구단체 임원 활동 당시 이사회나 각종 회의에 많은 서류를 챙기고 준비하는 이사로 유명하다.

회의나 행사에 근거나 자료가 없으면 올바른 회의진행이나 논리적으로 정확한 주장을 할 수 없다. 80년대 초부터 노동운동을 하면서 교섭테이블 석상에서 발언하거나 회의진행을 많이 하다 보니 철저하게 준비하는 습관이 몸에 베었다.

이용대 대구시족구협회 고문을 비롯한 족구 관계자들이 지난 2010년 대구에서 열린 소방관 족구대회에서 해외 선수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족구의 세계화를 위해 추진한 부분은 어떤게 있나.

90년대엔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는 팀들을 해외로 파견했는데, 이 당시 실무자로서 외국인들에게 족구를 보급하고 홍보하며 해외교민들과 교류전 경기도 열었다. 2008년 영국에서는 제1회 재영한인회 족구대회를 개최했고, 유럽에 족구 해외지부를 만들어 족구 역사와 경기 규칙을 보급했다.

-족구와 관련하여 존경하는 인물이 있는가.

초창기 전국조직을 결성하고 규칙과 규정을 만드느라 애쓰신 경기규칙심의위원들은 족구인들이 가장 존경스럽다. 족구단체가 어려울 때 회장직을 맡아서 족구에 헌신하신 고 정덕진 회장을 비롯해 김성관 회장, 이정수 회장도 많은 공로가 있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족구가 있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족구활동을 하고 있다면 족구원로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대한 과정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족구단체의 발전과 운영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족구인들이 민족구기로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의 족구가 있기까지의 족구발전 역사를 제대로 인식했으면 좋겠다. 앞으로 협회를 운영할 때는 특정 사람들의 의견에 의존하지 말고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하고 모든 족구인들과 함께 생각하는 협회가 됐으면 좋겠다. 족구에 모든 것을 바쳐온 족구인의 한 사람으로 민족구기인 족구가 세계적인 종목으로 발전되기를 바란다.

김재현 기자 k-jeah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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