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잃어가는 노인의 혼란과 공포..미스터리 속으로 빨려드는 관객

백승찬 기자 2021. 4. 5.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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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개봉하는 영화 '더 파더'

[경향신문]

영화 <더 파더>는 알츠하이머병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앤서니(앤서니 홉킨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판씨네마 제공
원작자·감독으로 장편 데뷔한 젤러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홉킨스
기발한 대본·명연기에 긴장감 팽팽
예술적 기교로 노년 고통 체험케 해

앤서니(앤서니 홉킨스)는 런던의 쾌적한 주택에서 오페라를 들으며 말년을 보내는 노인이다. 딸 앤(올리비아 콜먼)은 아버지를 위해 간병인을 붙여주려 하지만, 까탈스러운 앤서니는 혼자 잘 지낼 수 있다며 매번 간병인을 쫓아낸다. 앤은 아버지에게 새 남자친구와 파리에 가겠다고 선언한다.

언젠가부터 앤서니에게 혼란스러운 일들이 잇달아 벌어진다. 처음 보는 남자가 거실에 앉아 사위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여자는 스스로 딸이라고 말한다. 다음 장면에선 다시 예전의 익숙한 딸이 나타나지만, 이번엔 자기는 파리에 가겠다고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급기야 딸과 사위는 이 집이 앤서니의 집이 아니라 자신들 집이라고 전한다. 앤서니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집을 차지하려는 딸과 사위의 음모는 아닌지 의심한다.

예술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가상 체험이다. 소설 <모비 딕>을 읽으면 19세기 미국 고래잡이들의 집념과 광기를, 영화 <오발탄>을 보면 전후 한국인의 정신적 혼란을 느낄 수 있다.

영화 <더 파더>는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의 마음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제작진은 이를 위해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의학적 지식을 전해주지 않고, 불운한 노인을 연민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탁월한 아이디어에 바탕한 예술적 기교로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노년의 고통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는 데 <더 파더>의 가치가 있다. <더 파더> 관람 이후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이해도는 가상현실(VR) 체험 이상이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미스터리하다. 앤서니의 혼란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다가온다. 얼핏 딸이 아버지를 가스라이팅해 금치산자로 만들고 지배권을 행사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더 파더>는 미스터리를 길게 끌고 간 뒤 마지막 순간 반전을 제공하는 영화는 아니다. 앤서니가 습관적으로 하는 몇가지 행동들로 그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앤서니는 손목시계에 집착한다. 간병인이 훔쳐갔다고 하기도 하고, 스스로 어딘가에 숨겨두었다가 못 찾기도 한다. 사위가 찬 시계를 본 뒤 “영수증은 있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여러 차례 등장하는 이 같은 행동은 ‘시간을 잃어버린 남자’라는 시적 은유를 형성한다.

뒤죽박죽인 시공간을 경험하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잃으니 결국 자기가 누구인지도 알 수가 없다. 리어왕은 “나는 잠들었는가 깨어있는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냐”고 외쳤다.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고 주변 사람도 믿을 수 없으니, 이 노인은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존재가 된다.

집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6명의 배우만 등장하는데도 긴장감이 팽팽하다. 할리우드의 SF영화는 수천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하지만, <더 파더>의 연출자 플로리안 젤러는 기발한 대본과 연기만으로 같은 일을 해냈다. 영화 <더 파더>는 젤러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연극에 기반했으며, 그의 장편영화 데뷔작이다.

아이를 병상에 둔 부모가 아이 잃은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홉킨스는 <더 파더> 촬영 당시 82세였다. 영화 속 연기를 보면 홉킨스는 의문의 여지없이 건강해 보이지만, 노환은 의지로 막을 수도, 언제 올지 알 수도 없다. 당장 자신의 이름과 같은 영화 속 인물의 상황에 처할 수도 있지만, 홉킨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기했다. 용감하고 담대한 홉킨스는 1992년 <양들의 침묵>으로 아카데미 남주우연상을 수상한 이후 <더 파더>로 29년 만에 두 번째 수상에 도전한다.

<더 파더>는 남우주연상 외에도 작품상, 여우조연상 등 제93회 아카데미시상식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7일 개봉.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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