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도 원했던 '빈곤아동 한명도 없는 나라'에서 평안하소서"

한겨레 2021. 4. 5.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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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 이의 발자취] 고 강명순 목사님을 그리워하며
고 강명순(맨 앞줄 가운데) 목사가 2013년 세계빈곤퇴치회 이사장 시절 서울 신월동지역아동센터를 방문해 아이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부스러기사랑나눔회 제공

1975년 사당동 산동네 신혼 때부터
별세 전 날까지 46년간 빈민운동 외길
1986년 부스러기선교회 지금껏

1990년 공부방 봉사활동으로 인연
23년간 선교회 활동 함께하며 배워
“마지막 통화 때도 빈민 위해” 당부

강명순 목사님께서는 대학시절부터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에서 함께 활동해온 남편 정명기 목사님과 1975년 결혼해 곧바로 사당동의 산동네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빈곤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시작하셨지요. 공중변소에 문짝도 없는 판자촌이었답니다. 1986년 빈곤으로 인해 방임·방치되거나 굶는 아동들을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 ‘부스러기선교회’(부스러기사랑나눔회)를 만들고 도시빈곤, 공단지역, 농촌의 아이들과 여성들을 위하여 2021년 3월26일 소천하실 때까지 46년간 쉼없이 달렸습니다.

강 목사님의 46년간 빈곤아동·빈곤여성들과 함께해온 삶을 어찌 다 이야기하며 글로 담을 수 있을까요! 목사님과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시흥2동 산동네 공부방으로 봉사갔을 때였지요. 그 인연으로 1992년부터 부스러기선교회에서 교사로 상임활동가로 일하게 되었고 가장 가까이에서 23년간 함께 했습니다.

부스러기선교회에서 이사장과 사무국장으로 함께 활동하던 2006년 ‘아동인의 밤’에서 고 강명순(오른쪽 둘째) 목사와 필자 이경림(맨 오른쪽) 대표. 성남지역아동센터 제공

부스러기선교회에서 일하면서 강 목사님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현장에 마음을 두어라’였어요. 그들의 필요와 절박함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을 온 몸으로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1997년 선교회의 총무를 맡았을 때 목사님께서 주신 말씀은 지금도 나의 나침판이 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오는 요청은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해라!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무엇보다 강 목사님은 ‘지원한다’ 단어를 싫어하셨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빈곤아동에게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가능성, 역경을 이겨나갈 힘, 한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존중하며 믿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어요.

지난 3월28일 고 강명순 전 이사장의 장례식에서 부스러기사랑나눔회의 여성 활동가들이 고인의 유지를 잇겠다는 뜻에서 운구를 맡았다. 유족 제공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가 한창일 때 어느 큰 모임에서 결식아동들을 초청해서 근사한 저녁식사와 음악회를 연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행사를 주관한 곳에서 우리 아이들을 ‘부모가 가난해서 밥도 못 먹는 불쌍한 아이들’이란 표현을 노골적으로 했어요. 아이들은 물론이고 나 역시 마음이 불편했는데, 그 순간 강 목사님께서 뚜벅뚜벅 단상 앞으로 걸어나가시더니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불쌍한 아이들이 아닙니다. 이 아이들은 너무 소중한 아이들입니다.” 그때 그 모습은 지금도 내 눈에, 내 마음에 생생히 남아있어, 그 절규같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랬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비록 부모가 빈곤해서 제대로 돌봄도 받지 못하고 밥을 먹지도 못하고 잘 씻지도 못하고 학교에서는 ‘왕따’로 힘들어 하는 우리 아이들을 보이는 것이 아니, 환경이 아닌 그 존재 자체로 온전히 사랑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가 남기고간 우리 사회 변화는 너무나 크고 많습니다. 법과 제도도 없는 황무지 같은 지난 세월동안 결식아동을 위한 ‘먹거리 나누기 운동’을 통해서 푸드뱅크의 기초를 만들었으며, 결식아동을 위하여 보건복지부, 교육부를 통해 급식지원이라는 제도도 만들었습니다. 아동들이 건강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자립해야 하기에 한국 최초로 무담보소액대출(마이크로크레딧) 사업도 시작하셨지요.

빈곤지역에서 방과 후 위험에 노출된 아이들, 공부도 할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지역아동센터로 법제화하여 방과 후 돌봄의 큰 전환을 끌어내시기도 했습니다. 가정폭력으로 학대 당한 아이들을 위한 그룹홈과 쉼터사업 등등. 한 아이의 아픔에 그저 눈물한 흘린 것이 아니라 강 목사님께서는 거시적 측면에서 우리 사회 구조를 바꾸어 법과 제도를 만들어내셨습니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도 ‘아동빈곤법’을 제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빈곤아동 결식아동 한 명도 없는 나라 만들기 운동’을 주창하고 쓰러지기 전 날까까지도 쉬지 않고 펼치셨습니다.

고 강명순 이사장은 18대 국회의원 때부터 ‘빈곤 없는 나라 만들기 2020년까지’ 캠페인에 매진하다 지난 3월 갑자기 쓰러지면서 다쳐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빈나2020 제공

장례동안 목사님의 사랑으로 성장한 아이들이 어엿한 성인이 되어 찾아와 조문하는 모습을 보면서 목사님께서 뿌린 씨앗이 섞지 않고 한 생명을 살리는 일이였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동안 강 목사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빈곤아동’이라는 단어였고, 마지막 통화에서도 ‘빈곤아동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라는 숙제를 주고 가셨습니다.

낮은 곳을 향하는 마음이 없이는 절대 살아낼 수 없는 삶을 오롯이 46년간 변함없이 살고 가신 분, 지난 며칠 봄비 사이로 딱딱한 아스팔트를 뚫고 피어난 노오란 민들레 꽃을 보면서 목사님이 또 다시 생각났습니다.

누구보다도 민들레 꽃을 좋아하시고 민들레 사진도 많이 찍으셨지요. 잘려나간 나무 밑둥에서 피어난 민들레꽃, 아스팔트 사이의 민들레꽃, 아마도 아이들이 이런 척박함을 뚫고 자라나주길 바라는 마음이였으리라 여깁니다. 강 목사님께서 심으시고 뿌린 민들레꽃은 홀씨가 되어 우리 사회 어둡고 낮은 곳곳에서 다시 뿌리내릴 것입니다.

이경림/아동복지실천회세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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