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 녹취하게 해놓고..은성수 금융위원장의 유체이탈 화법

유소연 기자 2021. 4. 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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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적 설명은 책임회피"라고 질책
30분이면 됐던 펀드가입
이젠 녹취하느라 1시간씩 걸려
앱 사용 서툰 고령층 고려않고
"앱으로 집에서 하면 시간단축"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5일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 이후 향후 분쟁에 대한 부담으로 모든 사항을 기계적으로 설명하고 녹취하는 책임 회피성 행태가 있는데, 법 취지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금융투자업계 최고경영자(CEO) 간담회에서 “(금융 상품 가입 고객에게) 영혼 없는 설명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객이 가입하려는 상품에 대해 원금 손실 가능성 등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 불완전 판매를 막기 위해 금융소비자보호법을 도입했는데, 오히려 고객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불만을 키운다는 지적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권에서는 “금융 당국의 준비 부족으로 벌어진 일들인데 금융위원장이 오히려 금융회사 CEO들을 질책한다”는 말이 나왔다.

◇금융회사 탓만 하는 ‘유체 이탈 화법’

지난달 25일 금소법이 시행되자 시중은행 창구에서는 혼란이 벌어졌다. 은행들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직원들이 상품설명서를 모두 읽어준 뒤 소비자가 동의하는 내용을 녹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펀드 가입의 경우 기존에는 30분이면 가능했지만 이제는 1시간을 잡고 은행에 가야 한다. 소비자의 상품 이해도를 높인다는 취지이지만 현장에서는 “은행원은 설명서를 줄줄 읽고 소비자는 건성으로 듣다가 동의만 하고 있다. 서로 불편만 커졌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금융 당국은 금소법에 따른 세부 규정을 법 시행 일주일 전에야 내놓았는데 그마저 이러한 기계적 녹취에 대한 대응책은 빠진 반쪽짜리였다. 대부분 은행이 금소법 시행 전부터 녹취 시스템을 마련하고 일부는 시범 운영까지 들어갔기에 예상치 못한 사태도 아니었다. 법 시행 나흘 후인 지난달 29일 금융위는 ‘설명의무는 설명서를 빠짐없이 읽으라는 의미가 아니다’는 지침을 내놨지만 은행 영업점에선 여전히 ‘녹취 전쟁’ 중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은행 입장에서는 최대한 보수적으로 대응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금융위에서 법 시행 이후 땜질식 가이드라인을 내놓고 있어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고 했다.

또 은 위원장은 이날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 핵심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절차를 효율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불과 열흘 전인 지난달 26일 간담회에서는 “빨리빨리와 소비자보호는 양립하기 어렵다”며 금융 상품 가입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소비자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했던 것과 말이 달라졌다.

◇고령층 배려 없는 탁상공론

은 위원장은 당시 간담회를 마치고 기자들과 만나 모바일 앱을 이용해 가입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을 하기도 했다. 그는 “집에서 미리 해온 투자 성향 분석을 창구에서 확인해 쓰는 방식이 현장에서 유효하다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이라며 “책상머리 방안으로 볼 수도 있어 직접 현장에 가서 유효성을 확인하려 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모바일 앱에 익숙지 않은 세대에는 ‘그림의 떡’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020 디지털정보격차 실태조사'에 따르면 ‘모바일 기기로 필요한 앱을 설치하거나 이용할 수 있다’는 응답에 ‘매우 그렇다·그런 편이다’고 답한 고령층(만 55세 이상)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48%). 인터넷을 이용하는 고령층 중에서도 금융 거래 서비스를 이용하는 비율은 41%에 그친다. 금융권에서는 “그야말로 탁상공론”이라는 말이 나왔다.

금소법 이후 디지털 역량 격차가 금융 상품 접근성 격차로 이어지는 현상도 가속화할 전망이다. 최근 펀드를 가입하려고 은행을 찾은 60대 김모씨는 “법이 바뀌어서 최소 40분은 걸린다. 앱으로 가입하시면 편리하다”는 은행원 안내에 발걸음을 돌렸다.

김씨는 집에서 은행 앱을 두드리다 결국 포기하고 영업점을 다시 찾기로 했다. 그는 “앱으로 주로 계좌 이체만 이용하다 보니 상품 가입 메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찾기 힘들었다”며 “무엇보다 은행 직원 얼굴도 보지 않고 상품을 가입하기가 불안하다”고 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창구 대기 시간이 길어져 비대면 가입을 권하는 추세”라며 “하지만 노인들은 앱 사용을 안내하면 그냥 가입을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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