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자본주의'의 시작..먼저 '착해지는 기업'만이 살아남는다

2021. 4. 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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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의 대안] 대대적인 자본주의 재편이 시작된다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가 각 분야 전문가의 힘을 빌려 여러 산적한 문제의 대안을 들여다보는 기획 '포스트 코로나의 대안'을 마련했다.(☞ 바로 가기 : 시민건강연구소)

중국 우한에서 시작해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사태가 1년을 넘었다. 그 사이 1억1300만 명이 넘는 세계인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250만여 명이 사망했다. 전 세계 인구의 최대 3%를 죽음으로 몰아간 1918년 인플루엔자 범유행(스페인 독감) 이후 바이러스로 인한 인류 최대의 피해라고 할 만하다.

이런 대규모 피해가 미치는 영향은 일시적이지 않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는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비정규직이 안착했다. 실물 경제를 대신해 금융 자본 위주의 경제 체제가 중요한 한 축을 잡게 됐다. IMF 사태 이전과 이후의 한국은 완전히 다른 사회다.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인류사를 나눌 수 있다는 미국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의 글이 가볍게 와 닿지 않는 까닭이다. AC 1년, 관련 논쟁은 이미 진행 중이다. 국가가 빚을 질 것이냐, 가계가 빚을 질 것이냐는 숙제는 지금도 재난지원금 지급을 둘러싼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비대한 자영업 비중이 개개인을 대재난에 더 취약하게 만든다는 문제도 시급한 해결 과제로 떠올랐다. 필수적 진료를 받기 힘든 장애인의 건강 문제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느냐도 중요한 숙제가 됐다.

당장은 백신 접종이 시작된 지금도 여전히 지구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기느냐가 중요한 시기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어떻게 극복할지, 코로나19 이후 어떤 노력으로 더 좋은 변화를 이끌어낼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앞으로 매주 한 편의 전문가 글을 통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대안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이번 글은 내부 사정으로 인해 지난주에 나가지 못하고 금주 발행됩니다. 이점 양해 바랍니다.)

백신 도입으로 인해 코로나19와의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계속 미뤄져 왔던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재편이 본격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재편은 코로나19 이전을 회복하는 데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20세기 초반 두 차례의 대전(大戰)과 대불황 속에서 일구어진 자본주의의 구조적 전환까지 우리는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거대하고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한 나라나 개인의 운명은 상당 정도 여기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끝나가는 대(對)코로나19 전쟁

물론 우리는 아직 코로나19의 영향권 아래 있다. 국내에서 확진자 수는 꾸준히 늘어나는 중이고 4차 대유행 발생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코로나19와의 전쟁, 장기전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대유행 종식'을 선언하는 날을 과연 우리는 보게 될까?

하지만 지금 인류가 이 전쟁에서 승기를 잡아가고 있다고 해도 틀리진 않아 보인다. 승기는 잡았으나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은 상태에서 갈등이 잠복된 채로 있는 것─휴전 중인 분단국에서 70여 년을 살고 있는 한국인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상태다. 물론 종전이 선언되더라도 전쟁의 주요 당사국을 배후에 둔 소규모의 국지적 대리전은 계속되기도 하니, 질병은 물론이고 전쟁에서도 그것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완전히 박멸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는 쪽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 바이러스를 적절히 통제하는 편이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난 1년 사이 우리 인류가 코로나19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빠르게 키워왔다. 코로나19가 무엇인지조차 잘 몰랐던 1년 전을 떠올려보라. 그 사이, 바이러스 자체에 대한 지식이 많이 축적되었고, 백신의 개발과 상용화도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 중이다. 또한 코로나19 대유행이 미칠 사회경제적 영향에 대해서도 각국 정부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상당한 ‘감’을 갖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저마다 정책적 대응을 자국 실정에 맞게 업그레이드하는 중이다. 지난해 첫 번째 긴급재난지원금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무차별하게 지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코로나19의 정체와 그 영향에 대한 무지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정부는 그보다는 세심한, '맞춤형' 정책을 펼 수 있다. 요컨대, 코로나19는 계측조차 불가능한 '불확실성'(uncertainty)의 영역에서 확률적 계산이 가능한 '위험'(risk)의 영역으로 편입되고 있는 셈이다.

어차피 완전한 제압이 불가능한 상대와의 전쟁에서는 승기를 잡는 것만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전쟁의 국면 전환에 따라 갈등의 주된 전선도 바뀐다. 강력한 외부의 적을 두고 일시적으로 뭉치긴 했지만, 적의 위력이 떨어지면 내부의 갈등들이 고개를 든다. 이는 전쟁의 국면이 방역에서 백신으로 빠르게 전환되는 것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지금까지 각국 정부는 자신의 관할구역 안에서 바이러스 확산과 싸워 왔다. 그러나 백신의 개발과 상용화를 둘러싸고 글로벌 독점 제약사들 간에, 그리고 이들을 뒷받침하는 강대국 정부들 간에 치열한 경합이 벌어졌다. 백신의 보급과 관련해서도, 각국 정부들은 어떤 백신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신속하게 확보하느냐를 두고 서로 경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아가 대체로 일국 정부의 관할 아래 두어질 백신의 접종 과정에서도 접종의 우선순위와 비용의 분담 등을 놓고 첨예한 갈등이 형성될 것이다. 코로나19가 불확실성보다는 위험의 문제로 인식되는 상태에서는, 정부가 어떤 중요해 보이는 조치를 취하는 데 주저한다면, 그건 몰라서가 아니라 '효과에 비해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가 된다. 이제 인류의 적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라 같은 인류다.

왜 자본주의의 재편인가

이러한 상태가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코로나19가 글로벌한 재앙이었던 만큼 사태의 재발 방지와 인류의 공존공영을 도모하기 위한 지구 차원의 논의가 곳곳에서 벌어질 것이다. 인류가 현대사에서 겪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뒤에도 그런 회의들이 있었지 않은가.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러한 회의들이 전쟁을 뒷수습하는 데 그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전리품을 나누고 필요하다면 누군가에게 특정한 책임을 지우고 비용을 청구하는 등의 결정도 내려지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향후 인류가 지켜야 할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경제의 영역에서 그것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재편을 의미한다. 경제란 살아있는 생물과도 같아서 자체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경제란 결국 인간들 간의 관계로서만 존재하므로, 그러한 관계를 정의하는 각종 제도의 규정을 강하게 받는다. 제도는 경제라는 생물이 뛰어 놀면서 성장할 수 있는 안정적인 틀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숨통을 조이기도 한다. 또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도 앞으로 닥칠 모든 상황을 포괄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신기술 개발이나 새로운 수요 발생으로 경제가 과거엔 몰랐던 영역으로 발전하려 할 때 제도의 공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고, 이때 그 공백이 신속하고 적절하게 메워지지 않으면 경제의 발전은 제약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말하는 자본주의의 재편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직접적으로 그것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경제가 그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게끔 제도를 재편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재편을 통해 재 정의된 조건 안에서 경제 스스로 만들어갈 변화까지 포괄할 수도 있다.

지금 그러한 재편이 필요한 까닭은 경제가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계기일 뿐이며, 이미 자본주의는 치명적인 문제들을 노출하고 있었다. 첫째, 세계경제는 대체로 2007-2008년 글로벌 금융 공황(GFC: global financial crisis) 이후 새로운 발전의 동력을 찾지 못한 채 침체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둘째, 현재의 자본주의는 체제 자체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들을 낳고 있다. 크게 보아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혹사시키면서 두 세계 각각의 균형을 파괴해 왔다. 인간의 혹사, 불평등과 생태파괴의 심화는 그 결과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제도 개혁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혹시 자본주의 자체가 수명을 다한 것은 아닐까? 이젠 사회주의에 제대로 된 기회를 줘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보는 사람들도 많다. 여기에 정답은 없다. 우리의 미래가 새로운 '시즌'의 자본주의일지, 아니면 '진정한 사회주의'일지는 결국 갈등과 타협 속에서 우리 자신이 어떤 관계들을 만들어 가느냐에 달렸다.

우리 현실에서 자라고 있는 미래의 맹아들

자본주의의 대대적인 재편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바로 지금 인류는 그러한 재편을 단행할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재편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먼저, 개혁이든 혁명이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싹은 현재의 자본주의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앞에서 구별한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보자. 먼저 첫 번째 문제와 관련, 경제가 침체하고 있기는 해도, 자본주의 발전을 추동하는 기술진보가 한계에 봉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유행한 4차 산업혁명 담론을 떠올려보자. 찬반을 떠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먼 미래의 일로 여기기도 하지만, 사실 이 혁명을 위한 기술적 조건은 이미 상당 부분 확보된 상태다. 우리가 그 잠재력을 폭발시킬 여건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여건에서 신기술은 개발이 되어도 그 잠재력을 온전히 펼치지 못한다. 5G 기술을 둘러싸고 미국-중국 간 패권경쟁이 치열하지만, 정작 그런 앞선 기술로 우리가 하는 것은 아직 모바일 게임 정도를 크게 넘지 못하고 있다. 빅데이터, 인공지능, 플랫폼 기술 등을 발판으로 여객운수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리라는 기대가 낡은 기술에 익숙한 기득권 집단들의 '몽니' 앞에서 무너지기도 했다.

다음으로, 자본주의가 여러 부작용을 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에 대한 인간들의 의식도 발달해 왔다. 노동자 혹사, 불평등, 생태파괴 같은 문제들을 '발전에 따르는 어쩔 수 없는 부산물'로 보는 시각이 한때는 일반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폐해가 곳곳에서 드러남에 따라 그 확산을 막고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는 공감대도 넓어졌다. 한 나라 안에서, 그리고 범지구적 차원에서 불평등 심화를 막기 위해 소득과 자산에 대한 세제를 강화하고, 새로운 기술적 환경에서 소외되는 이들을 보호하며, 생태파괴에 따른 인류 공멸을 막기 위해 탄소배출을 줄이자는 등의 주장은 이제 더는 낯설지 않다. 이러한 실제적인 반성은 우리가 추구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 사유로 고양되기도 했다. 이 모두는 제한된 범위에서이기는 해도 나름대로 인류가 일군 정신적 진보라고 할 만하다. 필요한 것은, 그러한 진보를 몇몇 앞선 사람들의 '취향'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상식'으로 만드는 일이겠다. 한 나라 안에서는 물론이고 국경을 넘어 지역과 세계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폐해들을 바로잡고자 하는 논의들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문제와 해답을 모르는 게 아니라 다만 실효성 있는 결과들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대대적인 정부 재정 투입을 통해 그간 낡은 미국 인프라의 거대한 전환을 약속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혁신을 다시금 자극할 수 있다. 아울러, 장기간 시장 주도 국가로 기동한 미국에 새로운 전환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AFP=연합뉴스

코로나19가 선사한 기회?

왜 그럴까? 물질적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기술도 상당히 확보했고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우려도 충분히 깊어졌는데도, 왜 우리는 끝내 자본주의의 본격적인 재편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 재편이 지금 자본주의의 위기 타개를 위해 필요한데도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재편의 방식·범위·속도, 그리고 재편에 필요한 비용의 분담 등을 둘러싸고 각국 정부 사이에, 그리고 개인과 기업 사이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파리기후협약에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다 결국 탈퇴한 것, 내연기관 자동차를 만드는 글로벌 대기업들이 한편으론 테슬라와 전기차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말들을 쏟아내면서도 동시에 자사의 전기차 부문에 투자를 집중하는 것은 그런 이해관계 대립의 표현이다. 결국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쓰는 사람들이고 그들 사이의 관계다.

"……새로운 기술의 적용은 피튀기는 ‘자본 간 경쟁’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이 기존의 거대기업들이 새로운 기술의 도입에 저항하기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이 전기차 도입에 완전히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은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신기술 도입에 나선다고 했지만, 현대의 독점기업들은 기술을 독점하고 그 도입을 자신의 페이스에 맞게 조절하면서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이 거대기업들은 자신의 ‘(신기술 도입) 일정’에 정부를 끌어들이기도 한다. 전기차의 도입은 차량만 바꿔서 될 일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쓸 만한 배터리의 개발이 무엇보다 급선무이지만, 충전소 설치 등의 인프라 건설도 뒤따라야 하며, 그 사업성이 불명확한 도입 초기에는 이 역할의 상당 부분을 정부가 맡을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독점대기업들과 정부는 화석연료를 쓰는 기존 차량을 소유한 대다수 납세자들의 여론을 세심하게 ‘조작’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차 산업혁명의 성공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가치체계를 얼마나 그에 맞게 재편하느냐에도 달려 있다. 이것은 한 나라의 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제기구가 나서서 기후변화에 관한 여론을 환기하고, 세계경제포럼 같은 민간단체도 장단을 맞춘다." (김공회, 「'4차 산업혁명',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그 실체와 의미」, <의료와 사회> 제6호, 2017, 18-19쪽.)

바로 지금이 그간 미뤄졌던 자본주의 재편을 단행하기에 적기인 것은 그래서다. 코로나19는 자본주의가 현재 직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거기 관련된 여러 주체들의 이해관계 대립 때문에 미뤄지고 있는 조치들을 비로소 시행할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왜 그러한가? 위 인용문에도 쓰여 있듯 현재 요구되는 환골탈태 수준의 변화는 한 나라나 특정 개인 또는 기업이 독자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사실상 인류 모두의 동시적인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데, 마침 지금 인류 모두가 코로나19라는 공통의 적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여러 주체들 간의 세세한 차이들보다는 공통점이 부각되고 있다. 모든 나라가 동시에 극심한 경기후퇴를 겪으면서 산업부문 간의 차이도 줄고 경기순환도 과격하게 동조화되었다. 보통 큰 전쟁 이후에 중요한 국제적 협약들이 맺어진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자본주의를 더 스마트하게, 더 푸르게, 더 책임 있게?

그렇다면 포스트-코로나라는 배경에서 자본주의의 재편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자본주의가 맞고 있는 두 측면의 위기, 곧 발전의 동력은 떨어지는 반면 부작용은 점차 커지고 있는 현재의 추세는 어떻게 반전될 수 있을까?

첫째, 새로운 기술들이 상용화되려면 그에 맞는 적절한 인프라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정부의 계획적인 대규모 투자가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모든 나라에서 경제가 마치 융단폭격을 맞은 듯 처참하게 파괴된 상태이므로, 정부의 대규모 재정투입은 모든 나라에서 필요하다. 기왕 쓰는 돈이니 과거로의 회귀(business as usual)보다는 그보단 나은 방식의 재건(BBB: building back better)이 낫다.

이 BBB는 이미 2015년 국제연합(UN)에 의해 채택된 재난감축전략으로서, 코로나19의 범지구적 유행 이후 새삼 주목받고 있는 개념이다. 이는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도 채택하고 있는 입장인데, 그런 취지를 담아 그는 지난달 말 결정적인 '한방'을 날렸다. 무려 2.2조 달러의 재정을 들여 운송, 수도, 통신·전력망, 보육, 직업훈련 등 미국의 경제 인프라 전반을 정비하겠다는 것인데, 이 계획엔 최첨단 디지털·모바일 기술이 그 잠재력을 폭발시키고 친환경 전기차가 일반화할 기반을 닦는 것도 포함된다. 미국의 경제매체 <블룸버그>의 대표 칼럼니스트인 노아 스미스(Noah Smith)가 바이든의 위 계획을 '우리의 미래 경제의 필요에 부합하도록 나라를 개조하는 것'이라고 평가한 것은 그래서다. (☞원문 바로보기) 우리의 '한국판 뉴딜'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위와 같은 투자가 가능하려면 투자 대상이 명확해야 한다. 이를테면, 대체로 기능은 비슷하지만 경합하는 여러 기술들 가운데 무엇을 글로벌 표준으로 채택할 것인지가 결정되어야 한다. 또한 불평등 심화, 생태위기, 노동환경 악화 등 자본주의 발달의 부작용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국제적 협의가 긴요하다. 따라서 앞으로 이런 '교통정리'를 위한 국제적 논의들이─주로 강대국과 글로벌 독점 대기업들 간의─잇따를 것이다.

보통 이런 논의들은 결실을 맺기가 아주 어렵지만 지금은 다르다. 인류 모두가 코로나19라는 범지구적 수난을 겪은 뒤이기도 하지만, 때마침 최근 수년간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을 가중시켰던 요인들도 조금씩 정리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브렉시트(Brexit) 문제가 일단락되었고,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보다 예측 가능한 인물로 바뀌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월 집권 직후 미국의 파리기후협약 복귀를 선언했고, 덕분에 지구의 생태위기에 대한 국제적 논의도 급물살을 타리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 무산된 대서양 양안에 위치한 강대국들 간의 다른 협의들도 (형식이야 바뀔 수 있겠지만) 재개될 것이다.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Transatlantic Trade and Investment Partnership)이 대표적인데, 이는 단순한 자유무역 협정이 아니고 다양한 분야에 걸쳐 양 지역의 규제(=제도)체계를 일치시키자는 기획이었다.

이러한 국제적 공조 분위기 확산은 그간 지지부진했던 환경규제나 노동자 보호, 불평등 해소 등을 위한 합의가 빠르게 진전되리라는 기대를 높이고 있다. 실제로 탄소배출 관련된 규제는, 비록 코로나19의 영향이 아직은 강력해서 눈에 잘 띄진 않지만, 선진 각국에서,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이미 강화되고 있다. 많은 나라들이 자국에서 탄소 관련 세제를 강화하는 안을 올해 예산안에 포함시킨 상태이고, 미국과 유럽연합(EU) 간에 탄소국경세 논의도 본격화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정부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빠르게 진행 중인데, 대표적인 예가 ESG 경영의 유행이다. ESG는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거버넌스(governance)의 약자로, ESG 경영이란 환경, 노동, 사회 등 비재무적 측면에서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하면서 기업을 경영하자는 원칙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그저 '우리 잘 해보자'는 식의 기업들의 자정 노력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점차 많은 기업들에 강제되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몇몇 공신력 있는 기관으로 하여금 상장 기업들을 대상으로 'ESG 지수'를 내게 하고 금융기관이나 각종 투자회사들이 거기 입각해 투자결정을 내린다면, 환경이나 인간(노동자) 파괴에 무감한 기업은 분야와 업종에 상관없이 시장으로부터 자금을 조달받기조차 어려워질 것이다.

▲몇년 전만 해도 ESG는 한국에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기후위기가 심화하자, 빠른 시간 안에 ESG는 기업 경영의 대세가 되어 가고 있다. ⓒpixabay

그러나 계속해서 불균등하고 불평등하게!

이렇게 재편된 자본주의는 분명 지금보다 더 스마트하고 더 푸를 것이다. 분명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도 더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의심을 품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인프라 투자야 경제발전에 기여하겠지만, 환경과 노동자를 보호하고 분배를 개선하는 것은 흔히 경제발전의 성과를 갉아먹는 '비용'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 비용은 결국 강대국의 독점 대기업과 부자들이 부담할 것인데, 과연 이들이 위와 같은 변화를 허용할까? 허용한다. 허용할 뿐 아니라 지금 논의를 주도하는 게 그들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찌 보면 이것은 매우 간단한 문제다. 어차피 비용이라는 것도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나만 부담하면 아깝지만, 우리 모두가 부담하면 아무도 부담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 모두가 부담하는 것? 세금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보자. 국가가 정한 환경기준이 낮은데도 굳이 친환경적으로 물건을 생산하는 기업(A)이 있다고 하자. 이 상품은 보통의 상품보다 비용이 많이 들 것이며 그래서 가격도 높은데, 그런데도 이걸 구매하는 사람들이 있으니('착한 소비') 생산도 소규모나마 이루어진다. 이제 국가가 더 높은 환경기준을 모든 기업에 강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모든 기업의 비용이 위 A기업 수준으로 오를 것이다. 그러면 모든 기업이 같은 처지가 된 것일까? 아니다. 높은 환경기준에 맞춰 일찌감치 자체적인 기술과 공정을 발달시켜 온 A기업이 비용 우위를 갖는 게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A에겐 새로운 상황이 이롭다고까지 할 수 있다. 현재 진행되는 논의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선진국 수준의 환경기준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누가 이득을 보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이 논리를 확장해 볼 수 있다. 기업의 자금조달 비용이 글로벌 투자회사에서 산출하는 ESG 지수에 연동된다고 해 보자. 그러면 이사회에 노동자 대표를 넣지 않아 ESG 지수가 낮은 기업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런 기업은 계속해서 높은 비용을 감내하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노동이사제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노동이사제와 같은 제도도 보통 선진국에서 잘 확립되어 있으므로, 이 또한 선진국들이 유리할 것이다. 혹시 이를 통해 국내에도 노동이사제 도입이 강제되는 효과가 있으며, 이는 이른바 '경제민주주의'를 증진시킬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것을 온전한 의미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가야 할 길?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이 길만이 우리가 갈 길이다─자본주의 체제를 고수하는 한 그렇다. 이상에서 스케치한 자본주의 체제의 재편은 직접적으로는 이 체제가 직면한 위기를 해소하는 방책으로서 추구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그간 축적되어 왔지만 온전히 실현되지는 못했던 자본주의의 '진보적인' 잠재력을 현실화하고 실질화한다는 의의도 갖는다. 현재의 자본주의 재편 작업이 성공할 경우 우리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풍요롭고 스마트한 세상에 살게 될 것이다. 또한 그곳은 분명 이곳보다 더 푸르고 더 책임 있는 곳이리라. 이러한 기대는 자본주의 재편의 역사적 정당성을 이룬다.

그러나 늘 그렇듯 자본주의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다. 기업의 윤리성, 그것을 강제하는 시민의 감시와 참여, 적정 수준의 근로조건, 생태적 생산, 생태적 소비와 생활양식─지금까지는 좋기는 하지만 굳이 갖추지 않아도 되는 미덕들을 자본주의는 경제적 가치로 전환시킨다. 그럼으로써 누구에게도 강제하진 않지만 끝내 모두가 그런 미덕들을 갖추고자 노력하게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의 방법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돈벌이가 위의 모든 과정을 추동하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자본주의를 친환경적이고 친인간적으로 만드는 작업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일임이 분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득이 인류 모두에게 골고루 향유될 것 같지는 않다. 탄소배출 비용이 높아지면 궁극적으로 탄소배출이 줄어들 것이다. 그 결과 개선될 지구의 환경 자체는 우리 모두가 공평하게 누릴 수도─꼭 그렇지는 않지만─있겠다. 그러나 그것을 누리기 위해 누군가는 더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다. 탄소배출이 많거나 기업 지배구조가 '후진적'인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 탄소소비가 많은 국민들, 새로운 기술 표준을 습득하는 데 느리거나 핵심적인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국민들이 그럴 것이다. 그들은 더 쾌적하고 인간적인 환경에서 인간적인 방식으로 혹사당하게 될 것이다.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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