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절규 "신규대출 절반이 청년인데 더 늘리라니"
은행들 "시키는 대로 하면 부실위험만 커져"
◆ 오락가락 금융정책 ◆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갚는 방법은 빌린 사람이 정하도록 했습니다. 대출 절반이 청년층에 집중됐는데 청년 대출을 더 늘리라고 요구합니다."
금융당국의 현실을 도외시한 황당한 정책들로 금융권이 몸살을 앓고 있다. 당국이 실상은 파악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지원하라고 요구하면서 금융 창구는 갈수록 혼란을 겪고 있다. 급기야 금융권이 "정책이 집행되기 위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지침)을 제시해달라"고 요청하고 나섰다.
5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회사들은 지난 1일 시행된 중소기업·소상공인 대출 만기 연장과 관련한 '원리금 상환 컨설팅'에 대해 아직 세부 기준도 마련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대출 만기 연장과 이자 상환 유예 시한을 올 3월 말에서 9월 말로 6개월간 연장하면서 금융사가 4월 1일부터 상환 방법과 기간에 대해 컨설팅을 해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금융권은 당국이 '상환 방법과 기간을 차주(돈 빌리는 사람)가 선택한다'는 대원칙만 제시했을 뿐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지 않아 컨설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차주가 지나친 장기 상환 계획을 고집한다면 은행으로서는 부실 위험 관리 차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A금융사 관계자는 "차주가 상환 방법과 기간으로 거치 기간(원금 제외한 이자만 납부) 20년, 상환 기간 30년 등 초장기를 원한다면 은행 입장에서는 장기화에 따른 부실 리스크가 너무 확대된다"고 우려했다. 청년층에 대한 대출 확대 정책도 도마에 올랐다. 금융당국은 청년층에 대한 주택 대출 규제를 완화한다는 정책 방향을 밝혔지만 정작 시중 은행에서 주택 관련 대출 중 절반은 2030 청년층에 이미 실행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윤두현 국민의힘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6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SC제일·씨티)에서 신규 취급된 주택담보대출 총액 중 만 40세 미만 청년층에게 실행된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46.3%에 달했다. 이미 젊은 층이 주택 대출 시장의 큰손으로 등장했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은 편중 현상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지적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다만 "상환 기간 연장은 원칙적으로 총 3년 이내로 하기로 은행권과 협의했다"고 설명했다.
[윤원섭 기자 / 김유신 기자]
현장 혼란만 부른 금융소비자법·자본시장법
고난도 상품 판매 녹취 의무도
구체적 가이드라인 없어 곤혹
은행점포 폐쇄때 대체창구로
우체국이 대행하도록 했지만
비용 보안 문제로 지지부진
코로나19 대응이나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 등 새로운 이슈에 대해 서둘러 설익은 정책을 만들어놓고 정작 필요한 가이드라인 등은 나 몰라라 하면서 허점이 노출됐다.
지난달 25일부터 시행된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금융소비자보호법)'도 대표적인 금융시장 혼선의 주범이다. 당장 다음달 10일부터 고난도 상품 판매 때 '녹취'가 의무화되지만, 가이드라인이 없어 은행권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과 시행령 개정으로 금융사는 원금의 20% 손실 우려가 있는 고난도 상품을 판매할 때 녹취를 하고 2영업일 이상 숙려기간을 줘야 한다. 이와 관련해 A은행 관계자는 "비대면 녹취를 어떻게, 어느 범위로 할지 아직 가이드라인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며 "최악의 경우 펀드 등 비대면 투자 상품 신규 가입을 막아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으로 시중은행들은 이미 일부 비대면 상품과 서비스를 중단한 바 있다. 당국 가이드라인이 없는 데다 상품설명서 의무 전달 등 바뀐 규정을 적용하기 위한 시스템 정비에 시간이 필요해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현재 상품 판매 뒤 문제가 생기면 모두 은행이 책임지는 구조"라며 "가이드라인이 정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은행으로선 최대한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은행 지점이 사라지면서 우체국을 대체 창구로 활용하는 안을 금융위원회가 추진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현실을 모르는 정책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금융위는 지난해 8월 은행 지점 폐쇄 등에 따른 고령자의 은행 접근권 확보를 위해 우체국에서 은행 업무를 가능하게 하는 안을 발표한 바 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우체국에 줘야 할 수수료도 높고 고객 정보 유출 가능성 때문에 대부분 은행이 꺼리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시중은행들의 우체국 창구 활용은 검토한 지 반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 거의 진척이 없다. 탁상행정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대출 만기 연장과 이자 상환 유예에 대한 금융회사의 상환 컨설팅 역시 정부가 밀어붙이면서 금융권 혼란이 심해지고 있다.
금융당국은 지난달 초 상환 유예 연착륙 발표를 하면서 금융사가 이달부터 차주(돈을 빌린 사람)에게 다양한 상환 방법과 기간을 컨설팅해줄 것이라고만 밝혔다. 차주별로 다양한 상환 방법과 기간이 논의될 텐데, 구체적인 안은 사실상 금융사에 떠넘긴 것이다. B금융사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금융사 상환 컨설팅을 발표할 당시 '차주가 상환 방법과 기간을 선택한다'는 원칙과 6가지 예시 모델 외 지금까지 그 어떤 구체적 가이드라인도 제시하지 않았다"며 "금융사 입장에서는 어느 수준까지 차주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금융당국은 지난달 발표 당시 "상환 컨설팅 관련 직원 교육과 전산 준비 기간을 거쳐 4월 1일부터 적용하겠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셈이다.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은 "금융당국의 정책이 최근 방향성을 읽고 혼돈만 야기하고 있다"면서 "정책이 소비자 보호와 취약계층 보호 외에 금융 산업 육성 등도 아우르는 등 균형을 갖춰야 하고 시행 전 업권과 충분한 소통을 통해 미비점을 사전에 방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원섭 기자 / 이새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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