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컴·아이리버·팬택..엘지는 전례 뒤집고 애플처럼 부활할까?

김재섭 2021. 4. 5. 15:3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LG전자 스마트폰 사업 접어
시장 변화 대응 못해 '역사 속으로'

썬·노키아·모토롤라·삼보 뒤 밟을까
아이팟으로 부활한 애플 따를까
서울 여의도 엘지(LG) 사옥. 엘지 제공

2010년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 세계 최대 모바일 전시회란 명성 답게 세계적인 이동통신사들과 휴대전화 제조업체들이 대거 참여했다.

전시장서 한국 기자들을 대상으로 열린 엘지(LG)전자 기자간담회. “우린 할 말도, 내놓을 것도 없다.” 당시 엘지전자 휴대전화사업을 총괄하던 부사장이 단상에서 한 들머리 발언이다. 그는 “시장 및 기술 흐름을 잘못 읽었다. 애플 아이폰을 따라가려면 기술적으로 2년 가량의 격차가 있다”고 말을 이어갔다. 그의 목소리엔 힘이 쭉 빠져 있었다.

■2010년 바르셀로나 삼성·엘지 기자간담회 그날 저녁 바르셀로나 교외 한 식당에서 열린 삼성전자 기자간담회. 당시 삼성전자 휴대전화 사업을 총괄하던 최지성 사장은 “애플이 아이폰에 채택한 터치 방식은 남이 만들어놓은 콘텐츠를 활용할 때만 유용하다. 직접 콘텐츠를 만들거나, 한글처럼 2바이트 방식 문자를 쓰는 사용자 쪽은 감압방식(당시 삼성전자 옴니아 스마트폰에 채택했던 화면 입력 기술)이 더 유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드시 감압식 시대가 오게 할 것”이라고 ‘독기’를 뿜은 발언도 그는 내놨다.

앞서 애플은 2007년 1월9일 새 스마트폰 ‘아이폰’을 내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세계 최초로 터치 방식을 채택하고 음원 서비스를 얹는 등 사용법과 활용성에서 획기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졸지에 애플과 스티브 잡스는 혁신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아이폰 등장을 계기로 세계 휴대전화 제조업계는 지각변동을 겪었다. 변화 흐름을 주도하거나 올라 타 ‘살아남는 업체’와 흐름을 잘못 읽어 밀려나 ‘사라지는 업체’로 갈렸다. 애플에 일격을 맞은 삼성전자는 절치부심하며 ‘빠른 추격자’에 집중했다. 그 덕에 이 회사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과 쌍두마차 대형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풀 죽은’ 엘지전자 모바일 사업은 쪼그라드는 추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해마다 수천억원대의 적자를 이어갔다. 마침내 휴대전화 시장에서 손을 들었다. 시장 변화를 주도하거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해 사업을 접는 지경에 이르는 또하나의 사례가 된 셈이다. 피처폰 시절 세계시장을 주름잡던 핀란드의 노키아와 미국 모토롤라와 우리나라 팬택 등은 더 일찍 나가떨어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삼보컴퓨터·아이리버·팬택·엘지전자 휴대전화… 정보통신기술 분야에서 시장 흐름을 못 읽어 대처하지 못하거나 단기 성과에 눈 먼 경영을 하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사례는 종종 있다. 한때 벤처기업 성공모델을 상징하던 썬마이크로시스템즈가 대표적 예다. 이 회사는 닷컴 붐이 만들어낸 서버 수요에 눈 멀어 소프트웨어 회사로의 변신 속도를 늦춘 결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본 카메라 회사들이 스마트폰에 시장을 빼앗겨 잇따라 문을 닫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는 적잖다. 개인용컴퓨터(PC) 등장 초기, 조립 중심 시장을 이끌던 업체는 삼보컴퓨터였다. 이용태 전 명예회장이 1980년 6명의 동업자와 함께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자본금 1천만원으로 설립한 ‘삼보전자엔지니어링’가 뿌리인 삼보컴퓨터는, 국외에서 생산된 개인용컴퓨터 부품을 연구해 1981년 국내 최초 개인용컴퓨터 ‘SE-8001’을 만들었다. 국내 업체로는 처음으로 개인용컴퓨터를 캐나다에 수출하기도 했다. 1989년에는 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1991년에는 경기도 안산시에 연간 100만대 생산 능력을 갖춘 공장도 세웠다.

이후 삼성전자·엘지전자·대우전자 같은 대기업이 피시 시장에 앞다퉈 뛰어들었다. 삼보컴퓨터는 앞선 기술력으로 굳건히 버텼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피시가 대중화하면서 중국산 저가 제품들이 밀려들어오고, 개인용컴퓨터가 업무용 기기에서 멀티미디어 기기로 바뀌는 변화의 파고는 넘지는 못했다. 2005년 결국 법정관리(현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휴대용 디지털 음악재생기(MP3 플레이어) 업체 아이리버(2008년까지는 레인컴)도 같은 경로를 밟았다. 1999년 설립 뒤 2000년 국내 시장점유율 60%와 세계 시장점유율 20%를 차지했다. 전세계 휴대용 디지털 음악재생기 시장을 주름잡던 셈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음악재생기 시장을 빠르게 흡수하는 흐름에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2003년 코스닥 상장 당시 10만5200원이란 주가 덕택에 양덕준 창업자는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보다 높은 부자 순위에 올랐으나 이내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14년 에스케이텔레콤(SKT)에 인수되면서 아이리버란 이름조차 지킬 수 없었다.

페이스북 사옥 앞에 있는 표지석. 페이스북은 옛 썬마이크로시스템즈 건물을 사옥으로 쓰고 있는데, 안주하다 망한 썬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표지석 앞 부분은 페이스북으로 바꾸고 뒷면은 그대로 두고 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

■ ‘기술 유출’ 여론에 팔리지도 못하고 고사 기술·시장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밀려난 개인용컴퓨터·휴대전화 업체들은 대부분 중국·대만 업체에 팔렸다. 미 아이비엠(IBM)의 개인용컴퓨터(노트북 포함) 사업부가 중국 레노버에 매각된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삼보컴퓨터·팬택·아이리버 등 국내 업체에는 이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기술 유출’이란 잣대를 들어 중국 업체에 넘길 수 없다는 여론이 강했다. 대부분 인수·합병 기회를 얻지 못하고 선 자리에서 시들시들 말라죽어가다가 헐값에 매각되거나 조각났다. 엘지전자가 휴대전화 사업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매각이 아닌 사업 종료를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엘지전자 관계자는 <한겨레>에 “누가 사겠냐”고 말했다.

요즘 애플과 삼성전자 등이 중저가 모델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스마트폰도 혁신의 한계에 이른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스마트폰 시장에 변화의 흐름이 일고 있거나, 완전히 새로운 흐름이 일어나 지금의 스마트폰 시장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얘기다. 삼성전자와 애플의 스마트폰 사업도 결코 안심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애플이 아이폰으로 휴대전화 업계 구도를 바꾸고 산업 지형을 바꾼 것처럼, 누군가가 ‘포스트 스마트폰’을 내놔 애플과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사업을 삼보컴퓨터, 아이리버, 팬택, 엘지전자 휴대전화 사업 같은 처지로 몰 수도 있다.

2005년 삼보컴퓨터의 99만원짜리 노트북인 에버라텍 5500으로 한 여성 네티즌이 인기 게임인 ‘카트라이더’를 즐기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 엘지전자 ‘포스트 스마트폰’ 준비 기대할 수 있을까 엘지전자 휴대전화 사업 종료 결정 뒤 이 업체 주가는 올랐다. 해마다 수천억원씩 적자 내던 사업을 정리하는 것이니 주가가 오르는 게 당연하다. 반면 애플이 스티브 잡스 복귀 뒤 적자를 내거나 비전이 보이지 않는 사업을 대거 정리하는 대신 아이팟을 내놓고, 뒤에 이를 아이폰으로 발전시켜 대박을 친 ‘신화’가 엘지전자에서는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과거에 애플의 한 인사가 전해준 일화가 있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 복귀 뒤 신사업 아이템을 잡기 위해 전문업체에 맡겨 1만2천여명의 생활패턴을 구체적으로 관찰했다. 물론 당사자들 동의를 받았다. 출근 시 집 현관문에서 직장 도착 때까지와 퇴근 시 사무실을 나와 집 도착 때까지의 시간이 무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발견했다. 이 시간대를 노려 내놓은 게 아이팟이다.”

엘지전자 휴대전화 사업 종료는 구광모 엘지 회장의 결정이다. 구 회장 취임 뒤 이뤄진 결정 가운데 가장 큰 건이고, 선대 회장이 벌여놓은 사업을 안좋은 모습으로 정리한다는 측면에서 가장 고통스러웠을 성 싶다. 반면 애플이 스티브 잡스 복귀 뒤 기존 사업을 대거 정리하는 고통 끝에 아이팟과 아이폰을 만들어낸 것처럼, 구광모 회장과 엘지전자가 휴대전화 사업을 종료하는 고통을 동력으로 ‘포스트 스마트폰’ 시대를 이끌 신무기를 내놓지 말란 법도 없다.

김재섭 선임기자 jskim@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