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뿐인 주주가치 제고..자사주 소각 요구해도 무시하기 일쑤
상장사가 법인 명의로 자사주를 매입하면서 주주 가치 환원을 내세우지만 정작 이를 소각하는 것에는 소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3월 주주총회에서도 소액주주가 제안했던 자사주 소각건 역시 대주주의 반대로 부결됐다.
유안타증권에 따르면 지난 5년간(2015~2019년) 국내 상장사가 자사주를 매입한 금액은 23조8373억원에 달했으나, 소각한 금액은 4조4827억원에 불과했다. 매입 금액 대비 소각 금액 비율은 18.8%에 불과했다. 자사주 전량 소각 정책을 펴는 삼성전자(005930)는 집계 대상에서 제외했다.
통상적으로 자사주는 주주가치 환원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기업이 자사주를 매입하면 유통 주식 수가 줄어들어 주당순이익(EPS·당기순이익/유통주식 수)이 상승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회사가 이후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으면 주가 부양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언제든 시장에 풀릴 수 있는 주식을 곳간에 묵혀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30일 부산가스(015350)(부산도시가스) 3월 주주총회에서 ‘자사주 소각을 위한 자본금 감소의 건’이 소액주주 제안으로 다뤄졌지만 97.23% 반대, 2.77% 찬성으로 부결됐다. 2019년 주주총회에서도 같은 안건이 올라왔지만 마찬가지로 부결됐다. 현재 부산가스의 경우 최대주주 SK E&S의 지분율은 67.32%, 자사주는 9.08%, 소액주주는 23.6%다.
부산도시가스는 8년 전 최대주주 SK E&S가 자진 상장폐지를 위해 상장폐지 요건인 95% 지분율을 맞추고자 공개매수를 진행했던 곳이다. 당시 다른 주주가 지분을 내놓지 않으면서 공개매수가 좌절됐지만, 여전히 소액주주들은 자사주 소각을 주장하고 있다. 추후 공개매수를 진행하는 경우 부산도시가스의 주당 가치가 저평가돼서 공개매수 가격이 낮게 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화증권(003460)도 소액주주들이 자사주 소각 안건을 주주제안으로 올렸지만, 해당 안건은 지난달 26일 주주총회에서 부결됐다. 유화증권의 자사주 비율은 22.33% 규모다. 유화증권은 거래 활성화를 위해 자사주를 매입한다고 했지만, 자사주 비율이 매년 높아지면서 소액주주의 불만도 쌓여갔다.
자사주는 최대주주의 편의에 따라 활용되면서 소액주주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최대주주가 우호지분에 자사주를 처분하는 경우가 대표적 예다. 삼성물산(028260)은 과거 제일모직(028260)과 합병 당시 KCC(002380)에 자사주 899만주를 매각하면서 우호 지분을 확보했다. 회사 공동 자금으로 매입하는 주식이 최대주주 편의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한국테크놀로지그룹도 지난해 말부터 한국아트라스비엑스(023890)와 합병을 진행했는데 소액주주는 이들에게 합병 신주가 불리하게 배정된다며 합병에 반대했다. 한국아트라스비엑스의 지분 구성은 한국테크놀로지그룹 31.13%, 소액주주 10.44%, 자사주 58.43%였다. 최대주주와 소액주주 사이 실질적인 지분율은 30:10(75:25) 수준이지만, 실제 신주 배정 비율은 10%밖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사주를 무한정 곳간에 쌓아두는 현상은 지난 2011년 정부가 자사주 매입·처분 요건을 완화한 이후부터 시작됐다. 이전엔 상법 제342조에 따라 기업이 매입한 자사주를 일정 기간이 지나면 처분해야 했다. 하지만 정부는 법의 자사주 처분 의무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회사가 매입한 자사주를 계속 보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이후 자사주 비율이 높은 기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에서 12월 결산 법인 가운데 지난해 9월 결산 기준 자사주 비율이 30%를 넘는 기업은 총 12곳에 달했다. 한국아트라스비엑스(58%), 조광피혁(004700)(46%), 일성신약(003120)(42%), 텔코웨어(078000)(42%) 등이 이에 해당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에서는 자사주를 매입하면 소각하는 관행이 당연시되고 있다"면서 "자사주가 소액주주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현재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대두되는 만큼 상장사가 적극적으로 자사주 소각 정책을 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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