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있을 것 같은 미래가 눈앞에..기묘하고 생생하다, 경이로운 상상

배문규 기자 2021. 4. 4.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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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SF2021 : 판타지 오디세이'

[경향신문]

장종완, ‘그의 옷에는 민들레 솜털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의 옷에는 민들레 솜털이 잔뜩 묻어 있다’ ‘그의 옷에는 민들레 솜털이 잔뜩 묻을 것이다’, 2021, 장지에 아크릴릭 과슈, 130.5×194cm ⓒ장종완·아라리오 갤러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SF소설가·시각예술가들의 협업
텍스트와 시청각 이미지 엮어낸
회화·영상·설치작업 등 다채
주류 장르로 우뚝선 ‘SF선언’
현실 초월이 아닌 이 세계 이야기

‘둠즈데이 오디오. T.070-7616-9100’. 전시장 한편에 수상한 광고 간판이 걸려있다. 번호를 눌러본다. 흘러나오는 음성. “배에 오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1부터 0까지 빠르게 수행하세요.” 5번 ‘항해’를 선택했다. “…눈앞의 경계는 사라지고 벽은 무너집니다. 수평선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완전한 해방에서 공포가 밀려옵니다. 파도를 조심해! 그저 이끌려 둥둥 떠다닙니다. 둥둥둥둥 둥둥둥둥…….” 2021년에도 지속되는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은 마치 과거가 끝나지 않은 채 연장되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최윤의 ‘둠즈데이 오디오’는 코로나19가 덮친 지구의 시간을 늘려, 육지였던 곳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땅이 되는 시공간의 확장을 상상한다. 그리고 새롭게 연결된 세상에서 가상의 항해를 제안한다. 방법은 전화의 ‘자동 응답 시스템’. 관람객들은 일상적인 통화 행위를 통해 현실 너머 세계와 이어지는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된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SF2021: 판타지 오디세이’는 ‘SF(과학소설)’와 동시대 미술의 만남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사유하는 전시다. SF 소설가 김보영·듀나·배명훈·정소연과 국내외 시각예술가 10명이 협업했다. 소설 텍스트와 시청각 이미지를 엮어낸 회화·디지털페인팅·사진·영상·사운드·설치작업 등 30여점을 다채롭게 선보인다.

최윤의 둠즈데이 오디오

주류 장르로 우뚝 선 ‘SF 선언’으로도 읽힌다.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떠오른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에 이어 한국 최초 우주 영화를 표방한 <승리호>가 등장하는 등 ‘SF 붐’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 기후변화, 인공지능, 자율주행 자동차, 팬데믹 등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가 ‘SF적’이기도 하다.

전시장에서 처음 만나는 것은 ‘SF 연대기’다. 소설가 김보영이 장밋빛 전망, 경고, 사회비판, 소외된 자들, 모험, 새로운 세상 등 SF의 성격을 드러내는 ‘기념비적’ 문장을 25개 꼽고, 이 중 6개를 시각예술가 구현성이 만화로 시각화했다. “만일 어느 날 외계인들이 우리 행성에 도착한다면, 그들은 겉모습에 속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틀림없이 개미들과 대화하려고 할 것이다. 개미들이 지구의 진정한 주인이기 때문이다.” 김보영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에서 ‘미지의 모험’을 읽어냈고, 구현성은 이를 텍스트와 결합한 미로로 표현한다. “허황한 상상은 결코 독자를 매료시키지 못한다. 있을 법한 상상만이, …있을 듯하게 그려낸, 논리적이고 아름다운 상상들만이 전설로 남는다”는 설명과 함께.

SF는 ‘지금, 여기’에 발을 디디고 있는 상상력이다. 페미니즘, 생태, 정상성, 사회적 기억, 전염병 등 작품들이 다루는 주제 자체가 그러하다. 장대한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듯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 주변 삶에 대한 이야기다. 미래의 모습으로 이미 와 있는 현재의 언어이기도 하다.

루시 매크래, ‘고립 연구소’, 2016,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9분38초 ⓒ루시 매크래

양아치 작가는 전시장 벽면을 거대한 달 두 개로 덮었다. ‘제3의 달’을 띄우라는 아리송한 지시가 쓰여 있다. 헤드폰을 쓰고 ‘매직아이’를 하듯 초점을 흩어본다. 눈앞에 흐릿한 달이 포개지고, 귓가에 소음과 뒤섞인 낯익은 음악이 흘러들어온다. 지구를 지나가는 혜성에서 포착한 지구의 소리를 상상한 작업이다. 우주로 빠져나간 소리는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인 채 떠돌고 있을지 모른다고, 작가의 상상력이 관람객을 지구 바깥으로 이끈다.

SF는 ‘경이감’의 장르라고도 한다. 광대한 우주처럼 다른 차원의 세계를 접하고, 그를 통해 내가 알고 있던 세계를 벗어나 인식을 확장하도록 하는 얘기다. SF적 상상력은 미래를 경유하여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단순한 놀라움 이상의 복합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인식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SF가 현실의 초월이 아닌 이 세계와 존재에 대한 이야기인 이유다.

장종완의 ‘민들레 연작’은 익숙한 민들레를 ‘세상 곳곳에 세력을 확장하는’ 존재로 낯설게 바라보고, 루시 매크래의 ‘고립 연구소’는 인간이 클론을 먹는다는 상상을 통해 신체와 기술에 대해 성찰하도록 한다. 롬버스의 작업은 음악이라고 할 수 없는 음악을 통해 현실의 경계를 무화한다. 전시의 글과 이미지를 온라인(fantasy-odyssey.com)으로 확장한 데서 전시의 의도가 드러난다. 5월30일까지.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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