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숙의 강화일기] 꽃보다 감자

한겨레 2021. 4. 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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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숙의 강화일기]

김금숙 ㅣ 그래픽노블 작가

남쪽에서는 매화 지고 벚꽃 올라온다는데 북쪽이어서 그런가? 강화는 아직 매화가 피지 않았다. 우리 마을은 앞집 노란 산수유꽃이 봄이라고 제일 먼저 알려주었다.

강화의 봄은 일이 바쁘다. 겨우내 집에 있던 사람들이 새벽부터 나간다. 땅을 덮고 있던 검은 비닐을 벗겨내고 남아 있던 들깨 뿌리를 뽑아 밭가로 던진다. 한쪽에서는 마른 잎과 나뭇가지를 모아 태운다. 우리는 작년에 해 먹었던 텃밭을 올해는 해 먹지 못하게 되었다. 집에서 가깝지는 않았지만 당근도 심고 감자, 비트, 완두콩도 심어 먹었었는데 아쉽다.

앞집에서는 돌담을 쌓느라 이른 아침부터 돌을 나른다. 앞집 부부는 부지런하다. 매일매일 집이 예뻐진다. 나뭇가지를 정리하고 잔디에 풀을 뽑는다. 잔디는 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끊임없이 풀이 잔디를 비집고 올라온다. 우리 집 잔디는 풀을 뽑아주지 않아 거의 사라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잔디는 강아지들이 하도 오줌을 싸서 다 죽어버렸다. 앞집 잔디는 고르다. 고라니가 산에서 내려와 밭을 헤집고 농작물을 망쳐놓아서 밭가로 울타리도 쳤다. 자로 그은 듯 반듯하다. 나는 이웃의 부지런함과 완벽함에 감탄한다. 나는 집안일에 그리 부지런하지 못하다. 낙엽이 쌓여도 그냥 두고 나뭇가지가 자라도 그냥 두고 벌레가 장미꽃을 다 먹어도 그냥 둔다. 그나마 있던 꽃들은 새순이 올라올 무렵 강아지들이 뛰어다녀서 다 뭉개진다. 그래도 꽃보다 우리 강아지들이 먼저다.

옆집 개 엘리의 주인도 마당 들어가는 한쪽 입구에 꽃밭을 만든다고 열심히 흙을 고른다. 엘리가 옆에서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응원한다. 두 부부가 얼마나 꽃밭을 정성스레 정리하고 가꾸는지 모르겠다. 닭장에 갔던 남편이 돌아온 줄도 모르고 나는 시골의 아침을 만끽한다. 남편은 기분이 좋아 보인다. 이유를 알았다. 텃밭을 얻었단다. 그것도 우리 집 바로 옆이란다. 재주도 좋다. 그가 삽을 들고 다시 나간다. 나는 그를 따라간다. 마침 텃밭을 빌려준 할아버지가 밭에 있다. 빌려줬다는 두 고랑을 본다. 맨 가라 그늘이 져 있다. 햇빛이 잘 안 드는데 텃밭이 잘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해가 잘 드는 쪽 고랑을 하나 더 빌려달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쾌히 좋다고 한다.

할아버지에게 우리 닭이 방금 애써 낳은 달걀 몇 개를 준다. 할아버지는 이빨로 그것을 톡톡 깨더니 날것으로 먹는다. 우리 집 감나무를 보며 가지를 잘라줘야 한단다. 지난가을, 감이 많이 열렸지만 비 오고 이틀 사이 몽땅 땅으로 떨어져 으깨져 버렸다. 감나무에 벌레도 너무 많았다. 할아버지는 가지를 안 잘라줘서 감이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다고 했다. 전지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사다리를 잡고 남편이 할아버지 지시대로 감나무 가지를 자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더, 더”를 외쳤지만 남편은 몇 군데 자르다가 포기했다. 전지하는 것도 해보지 않은 이에게는 어렵다. 내가 감나무에 올라가서 한다니까 못하게 한다. 감나무 가지는 약해서 나무가 쉽게 부러진단다.

점심을 먹고 남편과 감자를 심으려고 감자 박스를 테라스로 가져왔다. 감자는 벌써 눈이 꽤 나 있었다. 눈이 난 쪽을 두고 사등분 하라고 했다. 난 여태 한 번도 눈이 난 감자를 잘라본 적이 없다. 감자를 막 자르려고 하는데 동네 언니가 지나갔다. 언니만 보면 꼬리가 떨어지도록 흔드는 감자(강아지)가 좋아 날뛰었다. 언니가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언니, 커피 마실래요?” 안으로 들어가 커피를 가져오는 사이에 싹이 난 감자는 심기 좋게 잘라져 있다. 우리 강아지 감자는 언니랑 놀자고 옆에서 언니의 치마를 물며 잡아당긴다.

언니는 집에 가는 길이라며 밭까지 따라온다. 밭 옆에 있는 나무에 꽃이 피었다. 벚꽃 같다. 예쁘다. “너무”라는 표현이 흔해서 안 쓰려고 하는데 너무 예쁘다. 꽃이 영원하다면 이토록 소중할까? 꽃이 지지 않는다면 이토록 설렐까? 이토록 안타까울까? 나는 감자를 심으려고 뒤를 돌아본다. 그사이 언니와 남편이 밭 끝자락에 가 있다. 꽃에 넋이 나가 있는 동안 언니와 남편은 벌써 감자를 다 심었다. 언니의 손은 정말 빠르다.

오후 강아지들 산책길에 밭에서 일하는 마을 사람들이 눈에 띈다. 무얼 심느냐고 물었다. 감자를 심는단다. 마을 전체가 감자만 심는 것 같다. 하긴 며칠 전 감자를 사러 농협에 갔다가 놀라 뒤로 자빠지는 줄 알았다. 감자 세 개에 팔천원이었다.

저녁 무렵,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기 시작한다. 우리 마을 감자 농사가 잘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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