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B로 軍기밀 러시아에 넘긴 해군 장교로 이탈리아 발칵

파리/손진석 특파원 2021. 4. 4.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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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녀 키우기 어렵다며 나토 기밀 문서 담긴 USB 단돈 5000유로에 러시아 무관에 넘겨

지난 3월 30일 밤 이탈리아 로마 시내의 한 수퍼마켓 주차장. 사방이 깜깜한 가운데 한 이탈리아 중년 남성이 러시아 남성을 만나 USB 한 개를 넘겼다. 러시아 남성은 대가로 5000유로(약 665만원)의 현찰을 이탈리아 남성에게 건네줬다. 두 사람을 현장에 잠복해 있던 이탈리아 군 특별수사대 대원들이 순식간에 체포했다.

USB에는 이탈리아군 내부 문건을 찍은 사진 181장이 담겨 있었다. 그중 8장은 1급 군사 기밀로 분류된 문건이었고, 47장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기밀 문서였다. 러시아 장교에게 돈을 받고 USB를 넘겨주려다 붙잡힌 남성은 이탈리아 해군 장교인 왈터 비오트(54)라는 사나이였다.

비오트를 돈으로 매수한 러시아인은 이탈리아 주재 러시아대사관 소속 무관(武官)으로 확인됐다. 이탈리아 군 헌병대는 러시아 무관을 체포했지만 그가 외교관 신분으로 면책특권을 갖고 있어 형사처벌을 할 수 없었다. 이틀이 지난 1일 이탈리아 정부는 체포된 무관과 동료 한 명 등 2명을 모스크바로 추방했다.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이탈리아 해군 장교 왈터 비오트/인스타그램

이탈리아 언론은 ‘매국노 장교’라며 비오트의 간첩 행위를 집중보도하며 충격을 표시하고 있다. 비오트는 상습적으로 러시아측에 돈을 받고 정보를 넘겨왔다가 꼬리를 잡힌 것으로 조사됐다. 이탈리아 언론은 냉전 시대가 종식된 이후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간첩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향후 재판에서 비오트는 스파이 혐의가 유죄로 판단될 경우 최소 징역 15년형이 선고될 예정이다.

비오트는 합참의장실 내 군사 기획 파트에서 근무했다. 그는 자신의 업무용 컴퓨터 화면에 기밀 문서를 띄운 뒤 화면을 사진으로 찍어 러시아측에 수시로 돈을 받고 팔아온 것으로 조사됐다. 비오트는 휴대전화로는 러시아측과 접촉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집무실 내 설치된 CCTV 화면에서 그가 업무용 컴퓨터 화면을 스마트폰으로 반복해 촬영하는 모습이 발각됐다.

로마 시내의 이탈리아 주재 러시아 대사관 입구/AFP 연합뉴스

체포된 비오트가 군 헌병대에서 어떤 진술을 하고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아내가 언론 인터뷰에 응해 “남편이 생활고 때문에 그랬다”고 주장해 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

비오트의 아내인 클라우디아 카르보나라는 일간 ‘코리에레 델라 세라’ 인터뷰에서 “남편은 이탈리아에 해를 끼치려는 의사가 없었으며, (해가 되지 않는) 최소한의 정보만 넘겨줬다”고 주장했다. 카르보나라는 이어 “네 자녀와 네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는 데다 26만8000유로(약 3억5600만원)의 주택담보대출을 갚느라 생활고를 겪었다”며 “남편 월급 3000유로(약 400만원)로는 생활이 어려웠다”고 주장했다.

카르보나라는 “특히 아이들 중 딸 하나가 계속 몸이 아파 병원비가 필요했다”며 “남편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고 강조했다. 심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는 카르보나라는 “코로나 사태를 맞아 가계가 더욱 힘들어졌다는 것을 아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비오트의 자녀 중 둘은 성인이지만 번듯한 직업 없이 간혹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올해 24살이라는 비오트의 장남은 일간 라레푸블리카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가족을 돌보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왈터 비오트의 변호사인 로베르토 데 비타가 2일 비오트가 수감된 로마의 레지나 코엘리 교도소 앞에서 AP 통신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AP 연합뉴스

이번 스파이 사태로 이탈리아와 러시아 간에 갈등이 커지고 있다. 루이지 디 마이오 이탈리아 외무장관은 “(러시아에 의한) 매우 심각한 적대적인 행위”라고 비난했다. 디 마이오 장관은 로마 주재 러시아 대사를 초치해 항의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이탈리아의 조치는 양국 관계를 해친다”며 “가능한 대응 방법을 찾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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