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 동화' 끝낸 배구 여제의 눈은 어디로 향할까

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2021. 4. 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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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국내 잔류보다는 해외 쪽에 더 시선 가 있는 듯..코로나19 상황이 변수 될 수도

(시사저널=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울지 마." 김연경(33)은 후배들을 감싸안았다. 얼굴은 사뭇 웃고 있었다. 챔프전 3전 전패. '새드 엔딩'이었지만 김연경을 비롯해 흥국생명 선수들을 질책할 이는 없었다. '김연경과 아이들'은 아주 잘 싸웠다. 사실 챔프전 무대에 오른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배구 여제의 11년 만의 복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3월22일 경기도 화성종합경기타운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 플레이오프 2차전 IBK기업은행과의 경기에서 흥국생명 김연경 선수가 손목을 살펴보고 있다.ⓒ연합뉴스

'흥벤져스' '어우흥'에서 갑작스럽게 맞은 급전직하

2020~21 시즌 V리그 개막 때만 하더라도 김연경과 흥국생명은 '해피 엔딩'을 꿈꿨다. 비록 직전 열린 코보컵에서 GS칼텍스에 덜미를 잡혔지만 당시에는 세터와의 호흡 등 훈련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정규리그 개막 이후 10연승을 질주하자 92연승(1991년 3월~1995년 10월)의 신화를 낳았던 호남정유(GS칼텍스 전신)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무적함대'가 부럽지 않은 '흥벤져스'였다. '어차피 우승은 흥국생명(어우흥)'이라는 말이 현실화되는 듯했다. 최강팀의 일방적 독주로 인한 리그 재미의 반감을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적은 외부가 아닌 흥국생명 내부에 있었다. 김연경과 이재영·이다영 쌍둥이 자매의 내부 갈등이 물 위로 올라왔다. 이다영이 SNS에 내부 갈등이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우연히 드러난 이다영의 속내가 김연경을 겨냥하고 있었지만, 김연경은 직접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담배를 피우면서 웃고 있는 노인 사진 한 장과  '최고의 복수는 복수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뜻이 담긴 영어 문장만 올렸을 뿐이다. 팀 분위기에 해가 될 것을 우려한 행보였다. 

내부 갈등설은 엉뚱하게 쌍둥이 자매의 과거 학교폭력 폭로로 이어졌다.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의 전개였다. 승승장구하던 흥국생명은 급격히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팀 전력의 절반을 차지하는 주전 세터(이다영)와 주전 공격수(이재영) 없이 잔여 시즌을 치러야만 하는 최악의 상황. 가뜩이나 외국인 선수도 부상으로 교체한 직후였다. GS칼텍스에 여유롭게 앞서던 1위 팀이었지만 정규리그 종료까지는 7경기가 남아 있었다. 

배구에서 볼배급은 중요하다. 아무리 훌륭한 공격수를 보유했다 하더라도 세터의 토스가 엉망이면 경기를 그르치게 된다. 이재영의 부재도 컸지만 국가대표 세터이기도 한 이다영의 이탈은 그래서 팀에 더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지금껏 백업 세터만 했던 김다솔의 경험이 너무 부족했다. 공격수와 손발을 맞출 시간조차 촉박했다.

시즌 막판 전혀 다른 팀이 되면서 흥국생명 선수들 또한 한껏 풀이 죽어 있었다. 잔여 7경기 동안 흥국생명이 거둔 승수는 2승에 그쳤다. 흥국생명이 주춤하는 사이 GS칼텍스는 연승을 이어갔고 결국 1위 자리를 GS칼텍스에 내주고 말았다. 

김연경은 경기 때마다 고군분투했다. 코트 위에서 한 발 더 뛰고자 했다. 상대 코트에 공을 내리꽂은 뒤 더 크게 "파이팅"을 외쳤고 더 큰 몸짓으로 후배들을 껴안았다. 김연경의 리더십은 정규리그 3위를 한 IBK기업은행과의 플레이오프(3전2선승제) 때 더욱 빛났다. 1승1패로 팽팽하던 3차전 때 인대 부상을 당한 오른손에 칭칭 붕대를 감고 나타나 팀 공격을 이끌며 흥국생명 선수들의 투지를 끌어냈다. 

비록 GS칼텍스와의 챔프전(5전3선승제) 때는 오른손 부상과 허리 통증, 그리고 피로 누적으로 점프 높이가 낮아지며 회심의 공격이 상대 수비에 번번이 막혔지만 김연경은 막판까지 세계 최고 공격수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1·2차전을 0대3으로 셧아웃당하고 3차전 또한 0대2로 몰리면서 결국 단 1세트도 못 따내고 완패할 뻔했으나, '김연경과 아이들'은 박미희 감독의 지휘 아래 투혼을 발휘하면서 3·4세트를 따냈다. 포스트시즌 경기가 이틀에 한 번씩 열린 터라 바닥난 체력을 쥐어짜 따낸 세트였다. 계양체육관을 찾은 홈관중에게 김연경이 선사한 마지막 선물일 수도 있는 세트였다.

김연경은 이날 경기 뒤 "힘든 순간이 많았다. 마음이 무겁고 책임감이 많이 느껴졌던 시즌이었다"면서 "마무리가 나름대로 잘됐다"고 자평했다. 어수선한 팀 분위기에서 그대로 무너질 수 있는 시즌이었지만 참고 견디며 나름의 결과물을 낸 데 따른 자신을 향한 위로였다. 도쿄올림픽 메달을 위해 택한 11년 만의 국내 리그 복귀. 고액 연봉까지 포기한 선택의 결과는 '잔혹 동화'가 됐지만, 김연경이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김연경은 국내 복귀를 후회하느냐는 질문에 "'차라리 빨리 시즌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날짜를 세기보단 좀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시즌 중 터키 등 해외로부터 입단 제의 많이 들어와

김연경은 포스트시즌 미디어데이에서 "한국에서 계속 배구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했다. 플레이오프 3차전 직후에는 "(국내에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자배구가 종료된 지금, 배구 여제의 눈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그를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아직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면서도 "해외로 진출할 경우 터키나 중국을 고려할 수 있는데, 중국은 코로나19로 껄끄러운 면이 있다. 터키도 아직 코로나19 확진자 추세가 줄어들지 않아 장담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해외리그의 경우 9월까지만 계약하면 된다. 

김연경 또한 챔프전이 종료된 뒤 "지금 전혀 팀에 대한 생각을 안 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시즌 중에 다른 리그로부터 입단 제의가 많이 왔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았다. 백신 등의 보급으로 코로나19 상황이 안정되면 김연경의 선택지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만약 김연경이 국내에 잔류한다면 흥국생명에서 1년 더 뛰어야만 자유계약(FA) 신분이 된다. 

김연경은 이제 도쿄올림픽 준비에 매진한다. 여자배구 대표팀도 쌍둥이 자매가 빠지면서 전력이 많이 약화됐다. 김연경의 어깨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대표팀 명단은 4월초 추려지며 4월말에 소집된다. 김연경은 "1~2주 정도는 편안하게 쉬고 싶다"면서도 "쉬면서 몸을 만들어 대표팀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대표팀 주장으로서 책임감이 크다. 그는 지난해 1월 도쿄올림픽 예선 때 복부 근육이 찢어져 복대를 한 상태로 경기에 임해 기어이 본선 출전권을 따낸 바 있다. 

벚꽃 피고 지는 봄에 슬프고도 짠한 새드 엔딩 드라마를 찍은 배구 여제 김연경.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 올가을, 과연 그는 어느 팀 유니폼을 입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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