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규의 책읽기 세상읽기] (58) '말' - 진정한 인간

박완규 2021. 4. 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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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장폴 사르트르가 1964년에 펴낸 ‘말’은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조부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낸 유년시절의 기억을 담은 자서전이다. 책읽기와 글쓰기의 경험이 골격을 이룬다. 책을 번역한 불문학자 정명환은 ‘말’이야말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자서전의 하나로 공인되었으며” “세계문학의 한 걸작”이라고 했다. 사르트르가 당대의 철학사조로 유행시킨 실존주의의 근원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사르트르는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세상을 만났다. 위엄 있는 책들이 질서정연하게 채워져 있는 서재는 신전이자 놀이터였다.

“나는 책에 둘러싸여서 인생의 첫걸음을 내디뎠으며, 죽을 때도 필경 그렇게 죽게 되리라. 할아버지의 서재는 도처에 책이었다. … 나는 작달막한 고대의 유물들에 둘러싸인 이 작은 신전 속에서 뛰놀았다.”

어린 사르트르가 책을 통해서 얻는 상상은 현실을 대신했다.

“오직 책들만이 나의 새들이며 둥지며 가축이며 외양간이며 시골이었다. 할아버지의 서재는 거울 속에 사로잡힌 세계였다. 그것은 현실의 세계와 똑같은 무한한 부피와 다양성과 의외성(意外性)을 지니고 있었다.”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백과사전을 뒤적거리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세계는 내 발밑에 층층이 겹쳐 있었고, 모든 사물이 제각기 이름을 지어 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사물에 이름을 붙여 준다는 것은 곧 사물을 창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 근원적인 환상이 없었던들 나는 결코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관념론이 서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회고한다. 

“나로서는 사물보다도 관념이 한결 현실적이었다. 왜냐하면 내게는 관념이 먼저 주어졌고, 더구나 사물로서 주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세계를 만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그것은 동화(同化)되고 분류되고 규정되고 사색된 세계, 그러면서도 아직도 무서운 세계였다. 나는 책에서 얻은 무질서한 경험과 현실적인 일들의 부조리한 흐름을 혼동했다. 나의 관념론은 바로 여기에 유래한 것이며 나는 그것을 청산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사르트르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인문주의자인 할아버지는 그에게 문학이 이데아의 세계를 관조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19세기의 사람인 나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손자에게 루이 필립 시대에나 통했던 사상들을 강요했던 것이다. 농촌의 관례가 유지되어 온 것도 아버지들이 이렇듯 자식들을 할아버지의 손에 맡기고 밭에 나갔기 때문이리라.”

그는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나는 그들의 불화와 화해의 우연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불안 속에서 살았다.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가장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저마다 이 세상에서 뚜렷한 제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그들의 의식적(儀式的) 태도를 통해서 내게 납득시키려고 했는데, 정작 나 자신의 존재 이유는 오리무중이었다. 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임을 별안간 깨닫고는, 이 질서 정연한 세계에 끼여든 나의 괴이한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것이었다.”
나아가 “내게는 존재의 관성도, 깊이도, 뚫어 볼 수 없는 두께도 없었다. 나는 무(無)였다. 지워버릴 수 없는 투명성이었다”고 했다.

그는 할아버지와 운문의 편지를 주고받은 것을 계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말이 사물의 진수(眞髓)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써 놓은 꼬불꼬불한 작은 글자가 도깨비불과 같은 빛을 잃고 차츰차츰 탁하고 단단한 물질처럼 굳어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나를 흥분시켰다. 그것은 허상(虛像)의 실상화(實像化)였다. … 나는 펜촉으로 긁적댐으로써 내 꿈을 이 세상에 단단히 붙잡아 매 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글을 쓰면서 서서히 자아를 확립하게 되었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이윽고 그는 글 쓰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기에 이른다.

“노아의 홍수 이전의 세계로부터 불쑥 출현하여, 남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기를 바라는 그런 ‘타자로서의 나’가 되기 위하여 ‘자연’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나는 내 ‘운명’을 마주 보았고 똑바로 인식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자유’였다. 나는 내 자유를 마치 외적인 힘처럼 내 앞에 우뚝 세워 놓았던 것이다.”

그는 “내가 낱말들을 교묘하게 엮어 놓으면 사물은 그런 기호 속에 얽혀들고 나는 그것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언어를 통해서 세상을 발견한 까닭에 오랫동안 언어를 세상 그 자체로 알아 왔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한한 ‘언어의 일람표’ 중 어느 한 곳에 공인된 명칭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일람표에 새로운 존재를 새겨 놓는 것이었다. 아니, 차라리 언어라는 올가미로 사물을 생포하는 것이었다.”

사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한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이름이 붙여지자마자 이미 그 이전의 것과는 완전히 똑같은 것이 아니며, 그 순결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인간은 말을 통해 세계에 관여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책을 마무리한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소품 창고에라도 치워 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무엇을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글 쓰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할 말이다.

박완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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