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역사를 바꾼 영국인 경찰의 부정부패

김형민 2021. 4. 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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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홍콩의 영국인 경찰 간부 피터 고드버의 뇌물수수로 영국 통치 전반에 걸친 불만이 폭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반부패 수사기관이 만들어졌고 홍콩 관가는 청정지역이 되었다.
ⓒAP Photo1997년 7월1일 0시 홍콩이 중국에 반환됐다. 사진은 홍콩 주권 반환식.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됐다. 언젠가 네가 “100년이 지난 약속을 그대로 지키다니 영국 사람들이 역시 신사다” 하며 감탄하는 걸 듣고 손사래를 친 기억이 난다. 영국 사람들이 신사라면 애초에 남의 땅을 빼앗지 말았어야지. 더욱이 중국이 19세기 말처럼 덩치만 크고 무기력한 거인에 머물러 있었다면 영국은 결코 홍콩을 반환하지 않았을 거야.

하나 오해가 있다면 오늘날의 홍콩 전체가 영국에 조차(租借)된, 즉 빌려준 땅은 아니었어. 1842년 아편전쟁 후 영국에 내준 홍콩섬과 1860년 애로호 사건으로 촉발된 2차 아편전쟁 후 영국이 차지한 카오룽 반도, 즉 구룡반도는 조차지가 아니라 할양지였다. 아예 영국에 ‘등기 이전’을 해준 땅이라는 것이지. 이후 영국 신사들은 청나라에 더욱 뻔뻔스러운 요구를 하게 돼. “우리 땅을 지키려면 그 근처까지 우리가 좀 차지해야겠어요.”

이 날강도 신사들 앞에서 청나라 실권자 리훙장(이홍장)은 언젠가는 다가올 시한을 제시했다. “원하시는 홍콩 주변 땅은 99년 동안 조차하는 것으로 합시다.” 일설에 따르면 리훙장은 “99년은 중국어로 ‘久久(저우저우:오래오래)’, 즉 사실상 영원하다는 말과도 연결된다오”라며 영국을 설득했다고 해. 속내야 어쨌든 영국도 이에 동의한다. 그렇게 설정된 조차지가 ‘신계’였어.

세월이 흘러 신계 지역을 반환해야 할 1997년이 다가오자 영국은 고민에 빠진다. 자신들이 영구히 차지한 홍콩섬과 구룡반도는 반환할 필요가 없었지만 홍콩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계를 돌려주면 홍콩의 존립 기반이 무너지는 셈이었거든. 이리저리 아쉬운 소리도 해봤지만 중국은 요지부동이었어. 결국 1997년 영국은 울며 겨자 먹기로 홍콩 전체를 중국에 반환하게 된 거란다. 신계를 조차한 이후 99년, 아편전쟁으로 홍콩섬을 차지한 뒤로 치면 155년 만의 퇴장이었지.

그 긴 세월 강제로 영국의 ‘양자(養子)’가 된 홍콩의 역사가 얼마나 복잡하고 기구하며 여러 얼굴을 지니고 있겠니. 유니언잭이 휘날리는 영국 땅이지만 주민의 절대다수는 중국인이었고, 영국의 통치와 중국의 일상이 온존했던 땅이었으니 말이다. 그 가운데 영국인들까지 감화(?)시켜버린 것은 ‘관시(關係:관계)’라고 불리는 중국의 부정부패 문화였단다.

역대 중국 왕조의 정치사는 ‘부패와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야. 청나라 건륭제 때 인물 화신을 예로 들면 그 거대한 청나라 왕조의 10년 치 세금 수입을 혼자서 꿀꺽했다고 한다. 도대체 어찌 그렇게까지 해먹을 수 있을까 싶지만, 또 그게 가능한 나라가 중국이었던 거야. 영국 통치하의 홍콩에서도 공무원들이 저지르는 부정부패는 대단했다.

“불을 끄기 위해 소방서에 연락해도 뒷돈을 요구하고, 경찰들은 마치 매일 양치질을 하는 것처럼 부패가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던” 곳이었어(〈주간조선〉 ‘박승준의 차이나 인사이드’). 그중 경찰의 부패는 상상을 뛰어넘었다. 1969년 4월28일자 〈경향신문〉 기사는 홍콩 경찰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어. “도박장이나 마약 업자에게서 상납을 받아 잡숫는다고 (…) 홍콩 도박장이 매달 경찰에게 200홍콩달러를 상납하고 경찰서장은 앉아서도 하루에 20홍콩달러를 번다. (…) 22살의 현직 경찰은 권총을 갖고 달아나 은행을 털어 9만 홍콩달러를 유흥비로 흘렸다. 뒷골목의 도색 영화관은 관람료의 절반을 경찰에 바치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로 돼 있다.”

ⓒSouth China Morning Post1975년 뇌물수수 혐의로 홍콩에 송환된영국인 경찰 간부 피터 고드버.

반부패 수사기관 염정공서의 탄생

이처럼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관시’는 고위 공무원직을 꿰차고 앉았던 영국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피터 고드버라는 홍콩의 영국인 경찰 간부가 있었다. 그는 꽤 유능한 경찰이었어. 1967년 홍콩은 중국 문화혁명의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이 일으킨 반영(反英) 폭동에 휩싸인다. 몇 달 동안 진행된 소요 과정에서 피터 고드버는 단호하고 기민한 판단으로 시위대에 대처하면서 영웅 대접을 받았어. 불법 이민자와 빈민들이 들끓는 구룡반도 지역의 경찰 넘버 투까지 올라갔으니 꽤 출세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

명예로운 은퇴 후 꽃길만 걸으면 될 것 같던 고드버는 뜻밖의 추락 위기를 맞는다. 그의 재산이 무려 약 430만 홍콩달러에 달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지(요즘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50억원 정도 될 것 같구나). 21년 동안 홍콩 경찰로 재직하며 받은 봉급의 여섯 배가 넘는 거액이었어. “도대체 이 돈을 어떻게 챙긴 것이냐.” 홍콩 당국은 해명을 요구했지만 1973년 고드버는 홍콩을 탈출해 영국으로 돌아가버린다.

홍콩 사람들은 격분했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것도 화가 날 지경인데 경찰 고위 간부가 영국으로 도망가서는 호화 생활을 누리다니! 연일 시위가 이어졌고 고드버를 잡아오라고 아우성쳤지. 사태 초기 영국은 손을 놓고 있었다. 고드버를 송환하자면 ‘쌍방 가벌성의 원칙’에 따라 홍콩과 영국 모두에서 범죄를 구성해야 했어. 영국 정부는 뇌물을 받았다는 구체적 증거가 아니라 “재산이 불어난 것을 설명하지 못하고 귀국했다”라는 이유로 고드버를 홍콩으로 송환하는 건 무죄추정의 원칙에서 벗어난다는 핑계를 댔지. 하지만 고드버 송환 요구 시위가 영국의 통치 전반에 걸친 불만이 폭발하는 양상으로 번지면서 영국도 이 일을 뭉갤 수만은 없게 됐다. 마침내 영국은 고드버의 부하 직원이 폭로한 뇌물수수를 근거로 그를 체포해 홍콩으로 송환했어. 고드버는 홍콩 법정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형기를 치르게 된다.

피터 고드버는 나름 억울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홍콩의 안정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데! 뇌물을 나만 먹은 것도 아닌데! 거의 모든 홍콩이 부패로 얽혀 있었는데! 자신의 영국인 상관들은 더 해먹는 걸 봤는데!’ 하며 감옥의 벽을 쳤을지 모르지. 그러나 홍콩 사람들은 수십 년 뒤 나온 한국 노래의 가사를 미리 읊고 있었을 거야. “내게 그런 핑계를 대지 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니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김건모 ‘핑계’).”

모든 범죄는 구조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경중은 따질 수 있을지언정 남들 다 하는 일이기에 나는 무죄라고 고집할 수 없어. 사회적 모순에 기대어 개인적 일탈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지.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범죄에 대한 태도라고 생각해. 범인 한 명을 잡아서 그를 태워 죽이든 능지처참을 하든 중요한 건 범인 개인에 대한 응징이 아닐 거야. 그를 처벌하되 다시는 그런 범죄가 없도록, 최소한 줄어들 수 있도록 구조적 해결책을 세우는 것이겠지. 홍콩 사람들은 그걸 해냈단다. 고드버 사건을 계기로 설립된 반부패 수사기관인 염정공서(廉政公署)가 막대한 투자와 강고한 의지를 무기로 부패와의 전면전을 시작했던 거야. 부패한 경찰은 충돌을 불사하면서 염정공서에 저항했지만 별 소득을 거두지 못했고, 썩은 내 풀풀 풍기던 홍콩의 관가는 동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청정지역으로 변화해갔어. 범죄자 고드버의 비리가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된 거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이 내부정보를 이용해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의혹에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사람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지. 피터 고드버 같은 이들을 잡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구조적으로’ 그런 범죄들을 원천봉쇄하는 일일 거야. 범죄자를 어떻게 심판할지 치열하게 논의해야겠지만, 그것이 분노의 배설에 그친다면 결국 남는 건 공허함뿐이지 않을까.

김형민 (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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