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살 개포동 그루터기, 8살 한라산 구상나무..두 나무 이야기 [커버스토리]

유정인 기자 2021. 4. 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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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인간에게서 살아남아 땅에 서서 죽고 싶다

제주 한라산 정상이 보이는 해발고도 1650m 지점의 숲 아래에 하얗게 말라 구부러져 죽은 구상나무가 보인다. 유정인 기자


나무가 이사를 한다. 재건축 아파트 단지의 ‘이주’와 ‘입주’ 사이, 개발 예정지의 ‘정보’와 ‘보상’ 사이, 나무들이 살던 땅을 떠난다. 나무의 이사는 강제이주다. 운이 좋으면 다른 땅에 심긴다. 어떤 이사는 밑동이 잘리고 죽은 다음에야 이뤄진다.

나무의 시간과 공간은 점점 더 인간의 것에 맞춰지고 있다. 수백년을 족히 산다는 메타세쿼이아의 생애는 아파트 재건축 연한 40년을 넘지 못한다. 서울 강남구 개포주공1단지에 심겼던 메타세쿼이아와 은행나무, 회양목 등 수만그루는 아파트 재건축 계획에 맞춰 2019년 베어졌다. 굵직한 나무 기둥들이 트럭에 실려 목재소로 갔다. 목재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나무는 폐기됐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이 사들인 경기 시흥시 땅에는 용버들 묘목이 생육에 맞는 적정 공간을 무시당한 채 빽빽하게 심겼다. 이렇게 자란 나무는 ‘짭짤한’ 개발 보상금으로 환산된 뒤 ‘이식’ 대신 뽑혀 나가기 일쑤다. 나무는 생명을 ‘보상’받지 못한다. 적절한 나무의 크기는 인간이 정한다. 조경수와 가로수는 채광을 막는다는, 간판을 가린다는 이유 등으로 잘린다. 높고 풍성하게 자랄수록 잘릴 위험이 커진다.

한곳에 뿌리내리고 사는 것만큼, 서서 죽기도 어려워졌다. 기후변화로 집단 고사 중인 구상나무는 쓰러져 죽는 경우가 많다. 이상기후로 계절마다 적절한 수분을 유지하는 게 점점 어려워진다. 집중강우가 늘었다. 토양이 쓸려나가면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없다. 잦아진 태풍에 단체로 드러누워 죽기 쉽다. 상록수인 구상나무 숲 군데군데가 하얗게 마른 고사목으로 희끗해졌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지정 멸종위기종인 구상나무를 지키려는 연구와 보존 노력은 이어진다. 하지만 죽음의 속도가 더 빠르다.

그럼에도 나무는 자란다. 밑동만 남은 그루터기에도 새 풀이 돋고, 죽어가는 숲에도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어린나무들이 흙을 뚫고 나온다. 어려워진 생존과 가까워진 죽음 사이에 뿌리를 박고 서서 하늘로 가지를 밀어올린다.

나무의 생은 기록되지 않는다. 이름을 갖는 것은 천연기념물, 보호수 등 일부다. 대개가 이름 없이 태어나, 부고 없이 죽고, 잊힌다. 기후변화로 76년째 4월5일이었던 식목일을 3월로 앞당기는 안이 추진되고 있다. 어쩌면 마지막일 ‘4월의 식목일’을 앞두고, 메타세쿼이아와 어린 구상나무 두 그루의 개별적 삶과 죽음을 기록했다.

■40년 만에 살 곳 잃고 쪼개진 나무들…‘기억의 생’은 끝나지 않았다

서울 강남구 개포주공1단지에는 자연발아한 나무들도 살았다. 5040가구 주민들의 사정만큼 다양했던 나무 수만그루의 생은 재건축 추진으로 2019년 멈춰 섰다. 푸른 지붕의 탁구장과 공터 주변에 서 있던 메타세쿼이아 22그루가 마지막으로 베어져 단지를 떠났다. 이성민 작가 제공
‘살아남은’ 그루터기의 생애
재건축 들어간 서울 아파트 단지
마지막 메타세쿼이아 22그루
벌목 결정되며 ‘폐기물’ 신세로

재건축으로 사람이 떠난 서울의 아파트 단지. 2019년 12월의 어느 날, 마지막까지 남은 메타세쿼이아 스물두 그루에 톱질이 시작됐다. 톱날이 밑동을 비집고 들어왔다. 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새들이 이리저리 날았다. 기둥이 넘어갔다. 포클레인이 뿌리를 파냈다. 거대한 뿌리들이 붙들고 있던 흙과 함께 지상으로 나왔다. 뿌리 하나가 뽑힐 때마다 땅이 울렸다. 나무들이 그루터기가 되기까지 한나절이 채 안 걸렸다.

스물두 개의 그루터기는 스물두 개의 ‘폐기물’이 됐다. 스물한 개의 그루터기가 차례차례 조각 나 버려졌다. 하나가 ‘살아남았다’. 나무들의 마지막을 기록해 온 이성민 작가에게 인계됐다. 포클레인이 그루터기 하나를 들어 올려 트럭으로 실었다. 밑동에 금이 갔다. 트럭이 경기 남양주시로 달렸다. 지게차가 그루터기를 땅에 내렸다. 금 간 곳이 부러지며 두 동강이 났다. 죽고 쪼개진 모습으로 40여년 만에 살던 땅을 떠났다.

나무가 서울 강남구 개포주공1단지에 심긴 것은 1982년 전후로 추정된다. 단지 조성을 마치고, 그해 11월부터 사람들이 입주했다. 124개 동에 5040가구가 들어찼다. 1984년 기준으로 1단지에는 메타세쿼이아를 포함해 30종이 넘는 나무가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가문비나무, 전나무, 회양목, 쥐똥나무, 은행나무, 은단풍나무 등 수만그루아파트 단지를 ‘작은 수목원’으로 만들었다. 메타세쿼이아는 1단지와 2단지를 합쳐 1716그루가 있었다(주택공사 ‘개포단지 건설지’(1984)).

메타세쿼이아는 은행나무와 함께 공룡이 있던 시절부터 지구에 살아 ‘식물화석’으로 불린다. 수백년을 성장하며 100m 높이까지 자라는 경우도 있다. 생장 속도가 빨라 1980~1990년대에는 아파트 단지에 많이 심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의 기준으로 ‘너무 높게’ 자라는 통에 요즘은 아파트에 많이 심지 않는다. 개포주공1단지의 메타세쿼이아들도 5층 아파트 높이를 훌쩍 넘겨 자랐다.

‘살아남은’ 그루터기는 아파트 51동의 가로면을 따라 심긴 메타세쿼이아들 중 중간 즈음에 있던 나무다. 양옆에 늘어선 나무들과 함께 메타세쿼이아 길을 이뤘다. 주변으로는 공터와 탁구장, 테니스장, 농구장 등이 있어 단지의 중심부 역할을 했다.

메타세쿼이아의 굵은 기둥은 목재가 돼 팔렸다. 이성민 작가 제공
주민들에겐 유년시절 추억이자
위로와 안식을 주던 숲이었기에
이름을 붙여주며 이별 행사 열어

나무가 높아진 시간만큼 이야기가 깃들었다. 사람들은 반려동물과 함께 숲길을 오가고, 그 길을 걸어 가족과 운동을 하러 갔다. 여름이면 삼복더위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던 키 큰 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모였다. 근처 초등학교 학생들이 등하교 시간마다 늘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나무 앞을 지났다. 어떤 아이들은 나무를 타고 오르기도 했다. 30년 전 이곳에 살았던 옛 주민은 지금은 돌아가신 엄마의 손을 잡고 나무 밑을 걷곤 했다. “엄마와 손잡고 걷던 푸른 길”이 “잊지 못할 초록 길”이 됐다. 15동에 살던 아이에겐 첫 탁구의 기억과 함께 남았다. 초등학생이던 1990년 메타세쿼이아 길을 걸어 도착한 단지 내 탁구장에서 아빠에게 처음으로 탁구를 배웠다. 1단지 나무들과 함께 자라 이제 불혹이 가까워진 어떤 이는 “비바람에도 묵묵히 거대한 고목으로 자라준 나무를 보고 늘 조용한 위로와 안식을 얻었다”. 누군가는 마음이 무너질 때, 나무를 찾아와 울고 갔다.(‘개포동 그곳’ 프로젝트 참여시민들의 답변지)

2014년, 15동에 살다가 동네를 떠났던 아이(이성민 작가)가 어른이 돼 다시 나무를 찾았다. 여전한 나무들 앞에 서니 그간 기억하고 있는 줄도 몰랐던 집 앞의 꽃, 유년기 언젠가 아파트에 쏟아졌던 ‘그날의 빛’의 잔상이 되살아났다. “그곳에 가서야 비로소 느꼈던 것 같아요. 내가 바로 여기에서 자랐구나. 이곳이 마음의 안식처, 고향이었구나.” 몇 번을 더 찾아갔다. 이미 재건축안은 본격화한 때다. 재건축과 함께 사라질 나무들을 기록하기로 했다. 사진과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하고 ‘개포동 그곳’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언론을 통해 나무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알렸다. 나무를 기억하고 지킬 사람들을 모았다. 2017년 7월부터 이주기간이 끝나는 2018년 9월까지 한 달에 1~2번 ‘나무산책 프로그램’을 열었다. 1단지에 살고 있거나 살았던 이들이 함께 단지를 걸으며 기억을 나눴다. 먼저 재건축에 들어가 단지 내 나무들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개포주공3·4단지 주민들도 찾아왔다.

나무들 ‘죽음의 행렬’은 곧 시작됐다. 건물을 부수기 전, 벌목부터 한다. 2019년 4월 벌목에 들어갔다. 메타세쿼이아는 100여그루로 줄었다가, 그해 6월 즈음에는 22그루만 남았다. 메타세쿼이아 숲길 옆으로 새 아파트 단지의 근린공원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근린공원 예정지의 나무를 보호해달라’고 강남구청에 낸 청원은 구청의 답변을 듣는 기준인원(1000명)에 못 미쳐 무산됐다. 일부라도 공원에 보존해 보려는 협의가 진척되는 듯했지만 성사되진 못했다. 측량 결과 나무들이 공원예정지 경계에서 1m 정도 벗어났다. 옮겨 심는 데는 돈이 든다. 1m 차이로 생사가 갈렸다. 가을, 22그루의 벌목이 결정됐다.

끝을 앞두고서 이름을 얻었다. 시민들은 추억이 담긴 스물두 그루에 ‘기억나무’ ‘최후의 22그루’ ‘내 동무들’ ‘개포동 키다리나무’ ‘내 생에 가장 빛나던 나무’ 등의 이름을 붙였다. 1982년부터 2018년까지 36년을 이곳에서 살았다는 옛 주민은 동네 이름을 따 ‘포동포동 나무’라는 이름으로 나무를 추억하기로 했다. 메타세쿼이아 숲을 ‘동네 강아지들의 안방’으로 기억한다는 주민은 나무를 ‘1단지 주민’으로 부르고 싶다고 했다. 2019년 11월22~23일, 재건축조합 측에 양해를 구해 마지막으로 나무를 기억하는 조용한 행사를 열었다. 곧 사라질 나무 앞에 검정과 흰 옷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모였다. 나무의 이름을 불러주고,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눴다. 20여일 뒤, 스물두 그루가 마지막 날을 맞았다.

그루터기 하나가 살아남아 서울숲공원으로 옮겨졌다. 그루터기의 쪼개진 틈새에 식물을 심어 다시 생명이 깃들게 할 예정이다. 이성민 작가 제공
베어진 나무, 다른 생명의 집으로
그루터기 하나 지킨 이성민 작가
“끝이 아닌 새로운 순환의 시작”

베어진 후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지난달 23일 찾은 서울숲 겨울정원에는 목재로, 그루터기로 흩어졌던 개포동 메타세쿼이아가 공원의 일부로 되살아나 있었다.

당초 스물두 그루의 나무 기둥은 잘린 뒤 목재소로 갔다. 서울숲공원을 운영하는 비영리재단 ‘서울그린트러스트’가 2020년 2~3월 아직 팔리지 않고 목재소에 남은 기둥들을 사들였다. 그해 5월 서울숲으로 가져와 ‘겨울정원’을 조성했다. 수직으로 서서 하늘을 향하던 나무가 수평으로 지상에 누운 ‘통나무 다리’로 변했다. 개포동 그때처럼, 엄마 손을 붙든 아이가 통나무 다리를 타고 놀았다. 좀 더 가는 기둥들은 여러 개가 모여 ‘곤충호텔’이 됐다. 생이 다하고 나서도, 다른 생명들의 집이 되어주고 있다.

‘살아남은’ 그루터기는 이성민 작가 지인의 남양주 땅에 1년간 머물다가, 2020년 11월 서울숲으로 왔다. ‘그린 아카이브’ 전시를 위해 옮겨온 뒤, 현재까지 겨울정원 맞은편 터에 머물고 있다. 이달 안에 이 터에 그루터기를 활용한 ‘겨울정원2’를 조성할 계획이다.

“그루터기만 남았지만 기억과 기념의 생은 다시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까지 나무를 기억하려 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서 다른 곳의 씨앗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끝이라기보다 나무의 생이 그렇게 다시 이어져 순환하는 것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살아가기 위해 기억하는 것이니까, 앞으로 더불어 가는 삶을 어떻게 꾸려야 할지 그루터기를 보면서 계속 함께 이야기하고 싶습니다.”(이성민 작가)

공원 한쪽에 놓인 그루터기의 뿌리는 땅에서 뽑혔을 때와 마찬가지로 흙을 잔뜩 움키고 있다. 그 위로 낙엽이 쌓이고, 씨앗이 날아와 자리를 잡았다. 어느 새 쑥과 잡풀들이 돋아났다. 다시 초록이 찾아왔다.

■기후변화로 죽어가는 구상나무들…고사목 옆 씨앗은 ‘생존’을 꿈꾼다

한라산 해발고도 1650m의 구상나무 숲은 그나마 건강한 숲으로 꼽힌다. 경사가 완만해 토양이 덜 쓸려가고, 바람을 덜 맞는다. 이끼도 제법 있다. 그런 곳에도 고사목은 드물지 않다. 지난달 26일 찾은 숲엔 초록 잎을 잃고 껍질이 벗겨진 하얀 고사목이 즐비했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제주 어린 구상나무의 여덟 해

어느 해 가을, 제주 한라산에 바람이 불었다. 구상나무 열매의 벌어진 틈새가 흔들렸다. 작은 날개를 단 씨앗이 열매에서 빠져나와 바람에 몸을 실었다. 얼마간의 비행 후 지상에 내려앉았다. 현무암이 돌서렁(돌이 많이 흩어져 있는 비탈)을 이루는 구상나무 숲, 낙엽이 깔린 바위 위다. 바위는 영실 탐방로 해발고도 1650m 지점에서 직선거리로 50m쯤 벗어나 있다. 사람의 발자국이 낸 길이 보이지 않는, 숲의 한가운데다.

얕은 흙이 씨앗을 덮었다. 비가 흙을 적셨다. 2013년 흙을 뚫고 최초의 싹이 텄다. 어른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줄기가 솟았다. 채 다섯 가닥이 못 되는 잎이 돋았다. 2014년 여름, 사람들이 숲으로 찾아왔다.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연구팀이다. 싹이 돋은 위치를 ‘A3-b1 방형구’로 기록하고, 어린나무 순번을 부여했다. ‘A3-b1 5번.’ 기호로 된 이름이 생겼다. 1년에 한 마디씩 자라는 구상나무의 특성을 살펴 수령은 1년으로 기록했다. 키(수고)는 8㎝, 양쪽으로 가장 긴 가지의 넓이(수관폭)는 3㎝. 먼저 길게 자라고, 이후 가로로 퍼진다. 이 정도면 첫 해에 아주 잘 자란 편이다. 2년 뒤 여름, 키가 5㎝ 더 자라고 가로가 4㎝ 넓어졌다. 다시 2년 뒤인 2018년엔 키가 2㎝ 더 자라고, 옆으로 9㎝ 더 벌어졌다. 가로와 세로 길이가 제법 비슷해졌다.

날개를 분리한 구상나무 씨앗(왼쪽)과 분리 전 씨앗. 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제공
한국서만 자생하는 멸종위기종
산림과학원, 2009년부터 관리
이름 붙여 관리해도 쉽잖은 생존

연구팀이 이 숲을 모니터링한 것은 2009년부터다. 구상나무(학명 Abies koreana WILS.)는 한국에서만 자생하는 고유종으로, 성체의 모양이 긴 삼각형을 이루는 상록수다. 흔히 ‘크리스마스 나무’로 알려져 있다. 한라산과 지리산 등 고산지대에서 사는데, 한라산의 경우 해발고도 1600m부터 많이 보인다. 2011년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됐다. 기온이 높아지고, 이상기후가 많아지면서 빠르게 쇠퇴 중이다. 영실 탐방로의 ‘구상나무숲’ 표지판 옆으로는 하얗게 마른 고사목이 대부분이다. 큰 구상나무들이 곧추선 채로 죽거나, 본 줄기가 부러져 죽거나, 기울어진 채 죽거나, 쓰러져 죽어 있다.

수령 1~2년의 어린 구상나무. 아직 가지가 옆으로 뻗지 않았다. 유정인 기자

어린나무도 죽는다. ‘A3-b1 5번’ 주변으로도 죽음이 흔했다. 세 살이던 2016년, 5~10m 거리를 두고 발아했던 어린나무 다섯 그루가 그해 여름을 맞지 못하고 죽었다. 다섯 살이던 2018년 여름엔 10m 반경 안의 3·4·6년 등 수령의 어린나무 여덟 그루가 이미 고사한 것으로 기록됐다. 대체로 이끼가 낀 바위 위에 뿌리 내렸던 나무들이다. 잎이 줄고, 가지의 껍질이 벗겨지는 게 죽음의 징후다. 잎들은 상록수의 푸른빛을 잃고 갈색이 된다. 죽음 뒤에도 붙어있던 잎들은 점차 바람에 쓸려가고, 버석한 가지만 남는다. ‘A3-b1 5번’에서 다섯 발자국쯤 떨어진 ‘A3-b1 1번’ 나무는 2018년까지 함께 살아 있었다. 지금은 갈색 잎 몇 장만 남은 채 바닥에 누운 어린 고사목으로 변했다. 1년 전쯤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라산 ‘A3-b1’ 방형구의 어린나무 5번. 수령은 8년, 키는 25㎝다. 유정인 기자
함께 발아한 상당수 ‘고사’에도
‘A3-b1 5번’ 8년 째 건강한 삶
200여년 수명 채울 수 있을까

어린나무가 죽는 이유는 갖가지다. 애초에 토양이 별로 없는 곳에 떨어져 죽고, 햇빛을 받지 못해 죽고, 적절한 수분을 공급받지 못해 죽고, 강풍에 얕은 뿌리가 뽑혀 죽는다. “많은 어린나무들이 이끼와 낙엽층이 있는 바위 위에서 발아합니다. 흙이 조금 쌓여있으면 어릴 때는 자랄 수 있어요. 하지만 토심이 얕으니 성체까지 못 자라고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체 수를 보고 ‘생각보다 어린나무가 꽤 있네?’라고 할지 모르지만, 성체로 자랄 여건이 안 되는 공간에 자리 잡은 개체가 많아서 현장에서 보면 걱정이 많이 됩니다.”(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최병기 박사)

자연의 선택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기후변화가 생존을 더 어렵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라산의 어린 구상나무들이 유독 바위 위에 싹을 많이 틔우는 것도 기후변화와 무관치 않다고 최 박사는 설명한다. 지난해 제주의 연평균기온은 16.8도로, 15.4도(1961~1970년)보다 1.4도가 높았다. 따뜻한 온도에 잘 적응하는 제주조릿대(벼과에 속하는 키 작은 대나무)가 한라산 높은 고도에도 많이 늘었다. 해발고도 1300m 이상의 구상나무 숲에도 집단으로 서식하는 제주조릿대가 빽빽해졌다. 넓은 타원형의 잎이 토양을 가리면서, 구상나무 씨앗들은 자라기 적합한 토양에 떨어지기 어려워졌다. 빈틈에 떨어진다 해도 제주조릿대 잎 아래에서는 햇빛을 공급받을 수 없어, 자라는 데 방해를 받는다. 한라산은 점점 더 구상나무가 수분을 적절하게 이용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변하고 있다. 구상나무는 겨우내 지표면에 쌓인 눈에서 수분을 공급받는데, 기후변화로 눈이 이전보다 빨리 녹아 사라진다. 이상기후로 집중강우와 태풍은 늘고 있다. 집중강우가 쓸어간 토양 위에서 나무는 깊게 뿌리내리기 어렵다.

지난해는 구상나무들에 특히 가혹했다. 2019~2020년 제주의 겨울은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따뜻했다. 1월 일 최고기온이 23.6도까지 올랐다. 제주 초령목 꽃이 예년보다 한 달 이른 1월25일 개화했다. 긴 장마, 잦은 집중호우 등 이상기후가 수시로 찾아왔다. 여름엔 ‘장미’ ‘바비’ ‘마이삭’ ‘하이선’ 등 태풍 4개가 연이어 닥쳤다. 많게는 하루 1000㎜까지 비가 내렸다. 강풍에 뿌리가 얕은 구상나무들이 집단으로 드러누웠다. 학술적으로 ‘DF(Fallen Dead)’로 기록되는 죽음들이다. 점점 더 쓰러져 죽는 구상나무가 늘고 있다고 했다.

‘A3-b1 5번’은 ‘아직까지는’ 운이 좋은 편이다. 올해 여덟 번째의 봄을 맞기까지 여러 번의 위기를 버텨왔다. 지난 3월26일 기준으로 키가 25㎝까지 자랐고, 폭도 21㎝로 넓어졌다. 본 줄기 양쪽으로 뻗은 일곱 가지에는 초록의 잎들이 달려있다. 한 가지 끝에 벌레가 잎을 말아 고치를 만들어 두었지만, 대체로 잘 자라고 있는 편이다. 부러지거나 마른 가지가 없고, 껍질이 벗겨진 부분도 보이지 않았다. 2018년까지 버티고 서 있던 바로 옆의 키 큰 구상나무가 3년을 지나오는 사이 고사했다. 군데군데 줄기가 하얗게 마르고, 살짝 기울었다. 큰 바람이 불면 언제고 넘어갈 수 있다. ‘어미나무’(키 큰 나무를 통칭하는 말)가 쓰러지면, ‘숲의 지붕’이 열린다. ‘A3-b1 5번’에겐 그때가 햇빛을 더 잘 받을 수 있는 기회다.

“공간에 빛이 들어오는 상황이 만들어지면 이 어린나무가 숲의 다음 세대를 이어갈 나무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어린나무와 중간나무, 어미나무가 세대교체하면서 공존해야 건강한 숲이니까요. 중간에 여러 피해만 안 받는다면 가능하겠지만, 이 지역도 토심이 얕아 어린나무 중 몇 개체가 살아남을지 몰라 크게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최병기 박사)

한라산 움텅밭에 건강하게 자란 구상나무. 수령은 50여년이다. 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제공

삼각형의 온전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자라기까지는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구상나무 수령은 200~250년 정도로 추정된다. 한라산의 가장 큰 구상나무는 14m 정도다. ‘A3-b1 5번’ 주변의 수령 37년 나무가 이제 160~170㎝가 됐다. 앞으로도 고비는 계속 찾아온다. 이미 주변의 눈은 많이 녹았다. 제주조릿대는 5m 근처까지 뻗어왔다. 바위의 토양은 더 씻겨 내려가지 않고 어린 구상나무의 뿌리를 지켜줄 수 있을까. 다가올 여름은 이상기후 없이 넘어갈 수 있을까. 겨울에는 눈이 적절히 내려 수분을 지켜줄까. 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데 온 지구가 필요하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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