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軍政의 뿌리에는 日 ‘스파이 학교’가 있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1. 4. 3.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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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양성소 ‘나카노 학교’ 분석
1940년대 서구 지배받던 동남아서
아웅산에게 군사 훈련법 전수해
버마 독립의용군 지도자로 키워

그림자 전사들

스티븐 C. 메르카도 지음|박성진·이상호 옮김|섬앤섬|460쪽|2만5000원

1995년 3월 미얀마에서 열린 군(軍) 창설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이즈미야 다쓰로(泉谷 達郞)는 귀빈석에서 퍼레이드를 지켜보며 자부심을 느꼈을 법하다. 1941년 중국 하이난섬에서 게릴라 지도자로 훈련시킨 청년 30명이 미얀마 독립과 군 창설 주역이 됐기 때문이다. 초대 국방장관을 지낸 아웅산과 국방장관·대통령으로 30년 가까이 집권한 네윈이 ’30인의 동지' 멤버다.

버마 독립영웅 아웅산이 독립투쟁에 함께 나선 30인의 동지와 찍었다. 일본 나카노 정보요원들은 1942년 중국 하이난섬에서 아웅산을 비롯한 30인의 동지를 게릴라지도자로 키웠다.

◇요원 2500명 배출한 스파이학교

이즈미야는 일본이 1938년 4월 비밀 정보요원을 양성하기 위해 만든 ‘육군나카노(中野)학교’(전신은 방첩연구소) 출신이다. 도쿄 나카노구에 위치한 이 학교는 1945년 8월까지 2500여명의 요원을 배출했다. 1944년 9월 문 연 후타마타 분교 출신까지 합해서다. ‘그림자전사들’은 이 정보요원들의 활약을 파헤친다. 이들은 만주와 중국, 인도, 동남아, 남태평양, 라틴 아메리카까지 흩어져 정보를 수집하고 현지 독립운동 세력을 지원하며 게릴라 부대 훈련과 지휘까지 맡았다. ‘아라비아의 로런스’로 알려진 영국 정보장교 토머스 로런스가 이들의 모델이었다. 간디·네루와 맞먹는 인도 민족지도자 수바스 찬드라 보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와 미얀마의 아웅산·네윈 등 내로라하는 지도자들이 이들의 지원을 받거나 협력했다.

◇싱가포르·네덜란드령 동인도 점령

일본이 1942년 영국령 싱가포르와 말레이반도를 점령하는 데는 나카노 출신 정보요원들의 역할이 컸다. 책임자인 후지와라 소좌의 이름을 딴 후지와라 기관은 나카노 출신 6명이 핵심이었다. 육군 최고의 선전 전문가인 후지와라는 일본의 침략 전쟁을 동남아와 인도 대륙의 민족들을 서구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전쟁으로 묘사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방콕에 본부를 둔 ‘인도독립연맹’ 프리탐 싱을 포섭, 대영제국 인도군 병사들을 항복하도록 설득했다. 후지와라 기관의 공작 아래 1942년 2월까지 5만 명의 인도 병사가 항복했다.

1974년 3월 일본군 ‘최후의 패잔병’ 오노다 히로(오른쪽) 소위가 마르코스 당시 필리핀 대통령에게 군도를 건네며 항복하고 있다. 오노다는 나카노학교 후타마타 분교 출신으로 1944년 12월 게릴라전을 펼치기 위해 필리핀에 왔다. /섬앤섬

석유 부족은 일본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세계 최대 유전 지대로 꼽히던 네덜란드령 수마트라섬 팔렘방을 장악해야 했다. 호시노 데스지 중위는 나카노 학교에서 인도네시아 공용어인 말레이어를 배웠다. 1942년 2월 14일 공수부대와 함께 낙하한 호시노는 정유 시설을 지키던 인도네시아 군에게 “네덜란드군만이 일본군의 적이다. 우리는 인도네시아인들의 친구”라고 외쳤다. 일본은 네덜란드군이 정유 시설을 폭파할 틈도 주지 않고 시설을 확보했다.

전쟁 당시 영국령 버마는 연합국이 장제스 정부에 물자를 공급하는 통로였다. 책임자인 스즈키 대좌 가명을 딴 미나미 기관은 1941년 후반 버마에 무기와 요원을 잠입시키는 게릴라 작전에 착수했다. 나카노 학교를 막 졸업한 야마모토 마사요시 중위 등 5명이 핵심에 있었다. 미나미 기관이 훈련시킨 아웅산은 버마에 잠입, 3만 가까운 병력을 거느린 버마 독립의용군 지도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일본 군부는 버마를 군정(軍政)아래 뒀다. 분노한 아웅산은 일본에 반기를 들었다. 연합군 공격과 버마인 반란에 직면한 일본은 손들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일본군 패잔병 오노다 히로 소위가 1974년3월10일 필리핀 루방섬에서 옛 상관 이 전투중지명령서를 읽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나카노 후타마타 분교 출신인 오노다는 끝까지 유격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받고 패전 30년이 가깝도록 필리핀 정글에서 혼자 전쟁을 치렀다.

◇전후의 ‘그림자전사’

나카노학교 출신 정보요원들은 패전 이후 일본의 생존에도 기여했다. 이들이 확보한 만주와 시베리아 지형 정보는 점령자인 미국과의 협상에서 유용한 지렛대로 활용됐다. 1948년 11월 맥아더 사령부는 청진, 원산, 평양 인근 지역에 요원을 투입해 소련군 현황을 정찰했다. 이 팀에 최소 1명의 나카노 출신 베테랑이 포함됐다. 인천상륙작전에도 나카노 학교를 지원한 연구소 출신들이 만든 북한군 위장복과 위장문서가 침투 작전 필수 물품으로 사용됐다. 그림자전사들은 정계와 기업, 사회단체에서도 맹활약을 펼쳤다.

나카노 학교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이는 1974년 3월 필리핀 루방 섬에서 발견된 일본군 최후의 패잔병 오노다 히로 소위일 것이다. 소총을 움켜쥐고 배낭을 멘 채, 차렷 자세로 옛 상관 앞에 서서 임무 중단 명령을 받는 사진은 단연 눈길을 끌었다. 국민 영웅으로 귀환환 오노다는 전후 일본에서 희미해져 가던 애국심과 사명감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나카노 학교가 알려진 것은 1966 년 개봉한 영화 ‘육군나카노학교’ 덕분이다. 영화 속엔 “뛰어난 스파이 1명은 2만명 정규사단 하나와 맞먹는다”는 대사가 나온다. 국익을 위해 헌신하는 정보 요원의 활약을 그린 이 영화는 고도 성장으로 자신감을 회복한 일본 사회에 애국 열풍을 부추겼다. 나카노 학교 출신들은 “서구 열강을 상대로 동남아시아의 민족 해방 전쟁을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본의 속셈은 서구 열강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체하려는 것뿐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일본이 침략전쟁을 펼치면서 전개한 정보전의 규모와 깊이에 놀라게 된다. 나카노학교엔 도쿄대, 와세다대, 게이오대 출신 엘리트들이 모여들었다. 정보 요원을 양성하면서 당시 유행하는 장발에 정장 차림을 허용하고, 절대 복종 대신 유연성과 자율성을 요구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래야 합리적 판단이 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훈련받은 정보 요원들은 방콕과 사이공, 양곤과 자바섬을 누비면서 군국주의 일본의 이익을 위해 싸웠다.

나카노 정보요원들이 이렇게 쌓아올린 정보와 네트워크로 전후 일본이 인도와 동남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지적도 흥미롭다. 요즘 미얀마로 불리는 버마 군정은 나카노의 유산이고, 일본의 대인도 외교에도 나카노 출신들이 구축한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을 우습게 아는 우리만 모르는 일본의 숨은 힘이다. 저자 스티븐 메르카도는 전 CIA 분석가이자 아시아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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