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국·공합작 항일전 승리 후 일등공신 룽윈 제거

2021. 4. 3.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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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 윈난인 하루 15만~30만 동원
전쟁물자 반입로 '버마통로' 개설
장 감금한 장쉐량에겐 토벌 위협
윈난 장악한 룽, 치안 유지에 주력
주요 수입원 아편 재배·매매 금지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0〉
항일전쟁 시절, 쿤밍의 야외행사 개막식장에 입장하는 룽윈(중앙). [사진 김명호]
1928년 윈난(雲南)을 통일한 룽윈(龍雲·용운)은 ‘신윈난건설’에 착수했다. 말로만 하지 않고 행동에 옮겼다. 골칫거리였던 치안 문제부터 손을 봤다. 장남의 구술을 소개한다. “원인은 탕지야요(唐繼堯·당계요)가 집권 초기에 채택한 초안(招安)제도였다. 탕은 투항한 토비들로 초안군을 편성했다. 초안군은 군복만 걸쳤을 뿐, 토비와 별 차이 없었다. 부친은 초안제도를 없애버렸다. 각 현에 자위대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자위대는 훈련이 필요 없었다. 윈난인들은 집집마다 총 몇 자루 없는 집이 없었다. 박격포를 갖춘 집안도 있었다. 부부싸움 하다 총격전 벌어지는 일이 허다했다. 자위대 무기는 성 정부에서 지원해 줬다. 토비들이 대규모 변란을 일으키면 정규군이 출동했다. 고립된 토비들은 다른 성으로 가거나 농민으로 변신했다. 3년이 지나자 비란(匪亂)이 자취를 감췄다.”

토비 척결, 광공업 육성 ‘신윈난건설’

프랑스 군모를 쓰고 도열한 룽윈의 직계 60군. [사진 김명호]
당시 윈난의 주 수입원은 아편이었다. 룽윈도 아편 중독자였지만 재배와 매매를 금지했다. 재정 기반을 바꾸기 위해 루충런(陸崇仁·육숭인)이란 준재를 중용했다. “권력자들은 남을 좀처럼 믿지 않는다. 나는 의심 많고, 제 뱃속만 채우는 3류 권력자가 되기 싫다. 내가 너를 의심하면 나를 배신해도 좋다”며 전권을 줬다. 루는 광업과 공업에 치중해 효과를 봤다. 교육과 위생개선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사생활은 엉망이었다. 사창가가 아니면 잠을 못 잤다. 출입을 밥 먹듯 했다. 고약한 화류병으로 홍콩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보를 접한 룽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영결식 날 소복한 여인 999명과 함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룽윈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국민정부를 가장 지지하는 지방세력이었다. 장제스도 광둥(廣東)과 광시(廣西), 쓰촨(四川)의 군벌들을 제압하기 위해 룽윈의 충성과 복종이 필요했다. 농락과 지지를 분간 못 하는 심복들에게 자신의 분석을 털어놨다. “룽윈은 천하에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 윈난의 패자(覇者)로 군림해 중앙에 칭신(稱臣) 하길 원할 뿐, 중원(中原)에는 뜻이 없다. 눈치 없는 펑위샹(馮玉祥·풍옥상)과 리쭝런(李宗仁·이종인)도 룽윈에겐 추파를 보냈다. 언젠가 요긴하게 쓸 날이 온다. 왼손으로 치켜올리고, 오른손으로 눌러라.”

미군으로부터 전술 교육 받는 윈난군. [사진 김명호]
1935년 장제스는 윈난에 중앙군을 파견할 명분을 만들었다. 도망(장정) 중인 홍군을 윈난쪽으로 몰아붙였다. 직접 전투를 지휘하겠다며 윈난을 찾았다. 룽윈은 장제스의 전용기에 동승했다. 장의 시종실 주임 천부레이(陳布雷·진포뢰)의 회고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룽 주석은 장공(蔣公)이 산천을 지목하며 전략을 설명하자 감탄했다. 문화사업 진흥과 서남지역의 국방근거지 건설에 치중하겠다며 지도받기를 청했다. 장공은 대략만 언급하며 전권을 맡겼다. 서두르지 말라며 웃기만 했다.” 룽은 장제스의 지지에 보답했다. 홍군의 장정을 저지했다.

1936년 12월 12일, 장제스의 성패를 가름할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이 시안(西安)에서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공합작과 항일전쟁을 촉구했다. 룽윈은 장제스 편에 섰다. 장쉐량을 “유치하기 그지없는 불효불충(不孝不忠)한 놈”이라 매도하며 토벌군을 일으키겠다고 공언했다. 스탈린의 중재로 국·공합작이 성사됐다. 이듬해 7월 항일전쟁이 폭발했다. 일본군은 해안선부터 봉쇄했다. 중국으로 유입될 물자를 차단했다. 난징(南京)의 국방회의에 참석한 룽윈은 중공대표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주더(朱德·주덕), 예젠잉(葉劍英·엽검영) 등과 교분을 텄다. 8월 20일 회의에서 장제스에게 건의했다. “윈난군 20만 명을 출전시키겠다. 외부물자 유입을 위해 버마(미얀마)와 윈난을 연결하는 도로를 수축(修築)하자. 인력 동원은 우리가 맡겠다. 자금은 중앙과 지방정부에서 반씩 부담하자.”

항일전서 윈난군 10만 명 넘게 전사

전쟁 시절 윈난 최대 도시 쿤밍 성벽의 항일선전 벽화. [사진 김명호]
쿤밍으로 돌아온 룽윈은 현장(縣長)회의를 소집했다. 무지막지한 명령을 내렸다. “외부와 교통이 단절됐다. 8개월 안에 도로 수축을 끝내라. 배당 지역을 기한 내에 완수 못 한 사람은 수갑 차고 내 앞에 나타나라.” 윈난은 하루에 15만에서 20만, 많을 때는 30만 명씩 인력을 동원했다. 8개월 만에 960㎞의 도로를 완성했다. 완공까지 1만 명 이상이 사망한 버마통로는 항전 시기 중국이 외부와 통할 수 있는 유일한 혈관이며 생명선이었다.

윈난군은 실전에 강했다. 전쟁 기간 40만 명이 출전해 10만여 명이 전사했다. 육박전은 어느 군대도 비교할 엄두를 못 냈다. 전투에서 등을 보이거나 도망치는 경우가 없었다. 룽윈의 직계 60군의 전투력은 당대 최강이었다. 전투마다 많이 전사하고, 많이 죽였다. 룽윈과 장제스는 부인들도 가까웠다. 전쟁 기간, 장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 룽의 부인 구잉치우(顧暎秋·고영추)는 펑위샹의 부인 리더촨(李德全·이덕전)과 부상병 위문에 분주했다. 전쟁이 끝나자 장제스는 승리의 공로자 룽윈부터 제거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공산당에게 대륙을 내줄 계기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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