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환자 입장에서 보는 치매..그것은 공포였다

한겨레 2021. 4. 2.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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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원의 영화감별사][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더 파더>
실제 80대 앤서니 홉킨스 영화
각본 때부터 주인공 '앤서니' 염두
그 존재가 영화의 처음이자 끝
올리비아 콜먼은 아카데미 후보
세트, 앵글 등 연극적 접근 방식
치매환자의 시선으로 본 치매
치매로 인한 시공간의 어긋남
차가운 현실 고독·공포 드러내
80대 노인인 이 영화 주인공의 이름은 ‘앤서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더 파더>는 앤서니 홉킨스의 영화다. 판씨네마㈜ 제공

<더 파더>는 단연 앤서니 홉킨스의 영화다.

물론 이 영화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로 이미 잘 알려진 플로리앙 젤레르가 2012년 처음 상연된 자신의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이자 장편 데뷔작)이다. 그럼에도 말이다. 일단 80대 노인인 이 영화 주인공의 이름은 ‘앤서니’(앤서니 홉킨스)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플로리앙 젤레르는 처음부터 앤서니 홉킨스를 염두에 두고 이 배역을 썼고, 앤서니 홉킨스의 출연을 위해 크리스토퍼 햄프턴(<어톤먼트>를 각색했던 영국의 베테랑 작가)과 공동각색까지 해가며 배경을 파리에서 런던으로 바꿨다. 그리고 앤서니 홉킨스는 흡사 치매에 걸린 리어왕인 듯, 분노한 사자의 포효부터 덫에 걸린 생쥐의 무기력함까지를 아우르는 모든 상태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치매환자 연기를 통해 감독의 노력이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었음을 증명했다. 캐스팅에 대한 확신과 집념 역시 감독의 공로임은 새삼 말할 것도 없겠지만, 아무튼 홉킨스의 연기가 없었다면 <더 파더>의 관람은 상당히 버거운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비극? 코미디? 아니 공포물

그런데 치매? 맞다. <더 파더>의 주인공은 치매환자다. 치매는 이야기꾼들에게는 쉽게 지나쳐버리기 힘든 소재다. 치매가 이른바 100세 시대에 누구나 직간접적으로 겪을 수 있는 흔한 병이 됐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과 천천히 그리고 영원히 이별해 가는 잔인한 과정에 수반된 무기력한 절망감, 그 애처로움이 아마도 이야기꾼들을 치매라는 가볍지 않은 소재로 이끄는 주요 성분일 것이다. 하여 치매를 소재로 하는 수많은 영화들(당장 떠오르는 예로는 <아무르> <어웨이 프롬 허> <스틸 앨리스> <슈퍼노바> 등등)의 밑바닥에는 절망적 비탄과 함께 출구 없는 피로감(!)이 깔려 있다.

그런데 뒤집어 보면, 이는 지금까지의 치매 소재 영화들이 치매환자를 곁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 치매를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치매환자의 입장(‘시점’과는 다르다)에서 치매에 대해 얘기하면 과연 어떤 영화가 될까. 애초에 그런 영화가 가능하기는 할까. 앤서니 홉킨스의 굉장한 연기를 논외로 한다면, <더 파더>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다름 아닌 ‘치매환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더 파더>는 연극적인 기법을 통해 이 난제를 풀어간다. 즉, 공간을 주인공 ‘앤서니’가 사는 아파트 중심의 실내 공간(세트)으로 한정하고, 프로덕션 디자인으로 표현되는 아파트 내부의 크고 작은 변화(예컨대 벽에 걸린 그림이나 소품들과 가구들이 달라져 있다든지) 또는 인물들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퇴장(프레임 인/프레임 아웃), 그리고 화면 프레임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등을 통해 이야기의 변화와 추력을 끌어낸다. 여기에 더하여, 흔히 ‘렘브란트 조명’이라고 부르는 인물 중심의 조도 낮은 측광 조명, 그리고 거의 사람의 눈높이를 벗어나지 않는 카메라 앵글 등도 <더 파더>가 취한 연극적 접근 방식을 두드러지게 한다. 굳이 <도그빌>이나 <대학살의 신> 같은 영화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연극적 접근 방식으로 인해 영화가 곧바로 연극 무대 중계방송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형식이라도 그것이 얼마나 의도에 부합하는가, 그의 전달에 얼마나 효과적인가 하는 것이다.

올리비아 콜먼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라 <미나리>의 윤여정 배우와 경쟁한다. 판씨네마㈜ 제공

영화는 런던의 주택가에 있는 아버지의 아파트를 찾아가는 딸 ‘앤’(올리비아 콜먼)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 장면에서 흐르는 카운터테너의 노래는 오페라 <아서왕>의 아리아. ‘녹지 않는 눈의 침대에서 저를 억지로 천천히 일으킨 당신은, 대체 어떠한 힘이십니까?’라는, 치매환자와 그를 둘러싼 세계라는 맥락에서 더욱 의미심장한 가사의 이 노래는, 옥좌에 앉은 늙고 외로운 왕처럼 소파에 홀로 앉은 아버지 앤서니가 헤드폰으로 듣고 있는 것이다.

앤은 어렵게 구한 간병인을 또다시(!) 쫓아낸 아버지를 원망하고, 아버지는 간병인이 시계를 훔쳐 갔다며 반박한다. 심지어 아버지는 딸마저 호시탐탐 아버지 물건을 노린다는 의심까지 하고 있다. 딸이 얘기한 곳에서 시계를 찾은 앤서니가 슬그머니 시계를 차면서 상황은 코믹하게 마무리되는가 싶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런던을 떠나 파리에 가서 살겠다는 앤의 말에 앤서니는 “나를 버리는구나?”라며 어린아이처럼 울먹이고, 영화는 순간 비극적 색채를 띤다.

코믹한 비극, 비극적 코미디, 또는 블랙 코미디? 하지만 <더 파더>에 가장 어울리는 장르명은 그다음 장면이 제시한다.(이하 스포일러 있습니다.)

역시나 혼자 오페라 아리아(이번엔 칼라스가 부르는 ‘카스타 디바’)를 들으며 주방에서 장 봐온 물건을 정리하는 앤서니. 그는 갑자기 들려온 문소리에 놀라 딸 이름을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다. 거실에 나가 보니 난생처음 보는 남자가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다. ‘폴’(마크 게이티스)이라는 이 남자는 앤서니의 이름을 알고 있다. 게다가 자신이 이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앤서니가 치매를 앓고 있음을 이미 눈치챈 우리는, 이 남자가 앤의 남편쯤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딸 앤은 앞 장면에 등장했던 앤과는 전혀 다른 사람(올리비아 윌리엄스)이다. 게다가 앤서니가 “네 남편”을 거론하자 앤은 “5년 전에 이혼”했다며 자신은 남편이 없다고 말한다. 앤서니는 주방에 다시 가보지만, 그곳엔 이제 장 봐온 물건들도 ‘폴’도 없다.

대략 상영시간 20분 경과 시점인 이 초반부까지에서, 영화는 기억 소실 외에도 초기 치매의 전형적인 증상들인 의심, 망상, 물건에 대한 집착과 감추기 등을 치밀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관찰자가 아니라 치매환자의 입장에서.

하여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가장 강한 감정은 코믹함도, 연민도, 동정도, 슬픔도 아니다. 그것은 공포다. 물론 이 영화의 공포는 카메라 앞에 ‘갑툭튀’ 하는 악령이나 귀신, 각종 절단용 공구류와 빨간 시럽 난무하는 그런 유의 공포는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겟 아웃>의 주인공(흑인)이 여자친구 가족들(백인들)에 의해 지하실에 감금당하면서 의식의 시커먼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장면을 볼 때 우리가 느꼈던 그 공포, 즉 감금과 고립의 공포다.

이 공포는 앤서니가 뭔가를 말할 때마다 돌아오는 당황스러운 표정이나 체념 어린 웃음, 또는 딱딱한 무시에서도, 또 순간적으로 아침에서 오후로 건너뛰어버리는 시간에서도, 그 시간 동안 맥락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사람들의 존재에서도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침대 밑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손처럼.

아버지와 딸의 웃음도 잠깐,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런던을 떠나 파리에 가서 살겠다는 딸 앤의 말에 아버지 앤서니는 “나를 버리는구나?”라며 어린아이처럼 울먹이고, 영화는 순간 비극적 색채를 띤다. 영화는 이렇듯 종잡을 수 없다. 이는 치매환자가 겪는 일상이기도 하다. 판씨네마㈜ 제공

그중 이 공포를 가장 절묘하고도 섬뜩하게 체험시키는 대목은 앤서니가 무한루프에 갇히는 장면이다. 앤에게 앤서니를 시설에 보내야 한다고 설득하던 폴(여기에서는 마크 게이티스가 아닌 루퍼스 슈얼이 연기한다)은 앤서니가 나타나자 입을 다문다. 그리고 폴의 날 선 말들과 앤의 언쟁이 오가는 5분가량 뒤, 앤에게 앤서니를 시설에 보내야 한다고 설득하던 폴이 그대로 다시 보여진다. 서로 마주 보는 도돌이표를 보는 듯한 이 장면은, 그 전부터 인물을 바꿔가며 계속 반복돼온 대사(예컨대 “약은 드셨어요?”)와 닭고기나 시계 같은 물건의 반복되는 등장으로 이미 고조돼 있던 공포를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현실과 환각 혼란 속, 섬뜩한 공감

후반으로 갈수록 영화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물들을 뒤섞으며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양상으로 흐른다. 하지만 영화가 취하고 있는 ‘치매환자의 입장’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는, 그것은 수습 안 되는 스토리텔링의 난맥상이 아닌, 점점 악화되어 가는 앤서니의 상태 그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앞서의 혼란을 모두 단번에 정리정돈하는 듯한 영화의 엔딩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겉보기일 뿐, 이 엔딩이 앤서니가 처해 있는 진짜 현실인지, 아니면 이 또한 앤서니의 또 다른 환각(또는 왜곡된 기억)인지는 결국 확정지을 수 없다. 그렇게 관객은 치매의 초기부터 말기까지를 연민 아닌 공포를 가지고 지켜보게 되며,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치매 영화들과는 다른 새로운 입장에서의 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 고독과 공포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 듯 상냥한 플라스틱 미소와 함께 ‘행복한 노후’를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사회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고 또 늙어가고 있다는 섬뜩한 공감 말이다.

▶ 한동원 영화평론가.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 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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