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 불어온 한반도..단일팀도 기억 속으로

한겨레 2021. 4. 2.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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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남북탁구단일팀 코리아][토요판] 남북탁구단일팀 코리아
⑦ 2018년에 멈춰선 교류
대전 코리아오픈 '아쉬운 이별'
유은총-김송이·차효심 남북선수
이듬해 국제대회서 반가운 재회
박창익 전무, 2019년 평양 방문
'하노이 노딜' 이후 반응 냉랭
대외관계 좌우되는 종속적 운명
2018 단일팀은 역사로만 남아
2018 코리아오픈 탁구대회에 참석한 남북 선수단이 2018년 7월21일 오후 대전시청 20층에 마련된 환송만찬장에 참석해 허태정 대전시장, 탁구협회 관계자, 시민응원단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 스포츠는 정치와 국경을 넘을 수 있는가. 1991년에 이어 2018년 또다시 남북탁구단일팀이 꾸려졌다. 그해 봄, 남북 두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난 직후였다. 30년 전 단일팀 선수들은 감독과 스승이 되었고, 그들의 제자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남북관계가 안개에 싸인 지금, 새 시대를 열었던 단일팀의 이야기를 다시 돌아본다. 이 기획은 영화사 명필름과 실화 전문기획사 팩트스토리가 함께 했고, 명필름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 중이다.

코리아오픈 국제탁구대회 혼합복식에서 장우진-차효심 조가 우승한 2018년 7월21일. 대전시는 그날 오후 6시 대전시청 20층 하늘마당 카페에서 북한 탁구 선수단 환송연을 준비했다. 만찬에는 북한 주정철 서기장을 필두로 25명의 선수단이 참석했다. 애초 북한 선수단의 시티투어도 계획돼 있었지만 시간상의 제약으로 취소됐다. 허태정 대전시장과 강문수 대한탁구협회 부회장, 현정화 대한탁구협회 홍보위원, 박일순 대전탁구협회장과 시민응원단 대표, 서효원 등 한국 선수가 참석했다. 이들은 원형 탁자에 각자 자리를 잡고 모여 앉았다.

서로 나란히 앉은 서효원과 차효심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스웨덴에서부터 이어졌던 단일팀의 인연은 대전 코리아오픈까지 지속됐고, 둘의 관계 역시 한층 가까워졌다. 북한 여자 선수들은 남한의 서효원을 “언니, 언니” 하며 잘 따랐고, 차효심도 마찬가지였다. 한반도기에 서명을 하는 선수단 모습을 보며 차효심은 서효원에게 말했다.

“제 스승이 유순복 지도자인데 지도자님 집에서 한반도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유순복은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 단일팀 선수로 뛰어 여자단체전 우승을 일궈냈다. 당시 선수로 활약했던 현정화·김택수 감독이 지도자 길을 걷고 있는 것과 똑같이 당시 북한 선수들도 후배를 양성하고 있었다. 유순복이 길러낸 선수가 바로 이번 단일팀 우승의 주역인 차효심이었다.

2018년 7월21일 오후 대전시청 20층에서 열린 2018 코리아오픈 탁구대회 북쪽 선수단 환송 만찬에서 차효심(오른쪽)과 서효원이 이야기하며 웃음짓고 있다. 연합뉴스

김택수와 유순복의 제자가 만나…

김택수의 제자 장우진과 유순복의 제자 차효심이 27년 전처럼 단일팀 형식으로 만나 세계를 제패했다. 특별한 의미가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한 남북의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했다. 27년 만에 불현듯 단일팀이 성사돼 우승까지 이어졌다고는 하나 일회성에 그치지 않으려면 이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일팀도 매번 잘할 수 없고, 결과가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 팀으로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점이에요. 역사적으로 고구려·백제·신라가 통일됐듯 지금은 남북이 대립하고 있지만 앞으로 100년 후에 봤을 땐 한 나라가 될 수 있겠죠. 그런데 갈라진 상황이 발목을 잡으면 더 발전적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데 후손들에게 남북 대립 관계를 물려주는 게 맞느냐는 겁니다.” 김택수 감독은 말했다.

2018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코리아오픈에서 두 번의 남북 단일팀 결성을 이끈 유승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스포츠는 정치에서 분리돼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남북 관계에 있어서 스포츠가 정치에 지배받는 것만큼 큰 게 없죠. 지금까지는 기적을 보여준 것이지만 기적이란 것은 일회성에 불과합니다. 제대로 단일팀을 하려면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해야 하고 호흡을 맞춰야 합니다. 그러지 못했을 때 선수들은 자기 기량을 발휘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2018년 코리아오픈 일정이 모두 마무리되고,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북한 선수들을 배웅하며 장우진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오늘의 만남이 언제든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관계. 아쉬움이었을까, 단일팀에 대한 미련이었을까? “감독님도 이러셨어요? 마음이 좀… 그러네요.” 장우진이 옆에 서 있는 김택수 감독에게 물었다. “원래 마음 찡한 게 있지.” 단일팀으로 직접 뛰며 북쪽 선수와 호흡을 맞춰본 선수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 타의로 단일팀이 성사됐고 힘을 합쳐 우승이란 기적을 이끌어냈다. 사람들에게 감동도 주고 눈물도 안겨줬던 순간. 함께 땀을 흘리고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며 기억을 공유했는데 헤어질 때 마음 찡함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할 터였다.

해가 가기 전 남북 탁구 선수들은 단일팀으로 만나고 또 만났다. 코리아오픈 3개월 뒤인 2018년 10월 스웨덴오픈에는 남자복식의 장우진(남)-함유성(북), 임종훈-안지송 조와 여자복식 서효원-김송이, 최효주-차효심 조가 출전했다. 한 달 뒤인 오스트리아오픈에는 남자복식 임종훈-안지송 조, 여자복식 서효원-김송이 조, 혼합복식 장우진-차효심 조가 짝을 이뤘다. 12월에 열린 인천 그랜드파이널스 대회에는 혼합복식 장우진-차효심 조가 출전했다. 그해 최상위 선수들만 모인 대결에서 장우진-차효심은 준우승을 차지했다. 2018년은 남북 탁구 단일팀 역사를 빼곡하게 장식할 해였다.

2018년 7월23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에서 유남규(오른쪽 셋째)·현정화(맨 오른쪽) 감독이 출국을 앞둔 북한 선수들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음에 만나면 손편지 써줘”

남북 탁구 단일팀으로 뜨거웠던 2018년이 지나갔다. 유은총이 김송이와 차효심을 다시 재회한 곳은 2019년 4월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린 헝가리 부다페스트였다. 단일팀으로 뛰었던 1년 전과 달리 헝가리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선 남북 선수를 향한 스포트라이트는 꺼졌다.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시간, 유은총과 김송이는 소소하고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둘은 대회 중 경기가 없는 시간을 틈타 연습장에 매트를 깔았다. 차효심도 합류했다. 셋은 초콜릿을 까먹으며 “남자친구는 없는지, 음식은 뭘 좋아하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 것인지” 오손도손 정담을 나눴다. 20대 여성들이 커피숍에서 만나 수다를 떨듯 남북 선수들은 모여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27년 전 23살의 현정화가 리분희 숙소에 몰래 찾아가 나눴던 이야기를 이들은 2019년 헝가리에서 풀어놓은 것이다. 남북 단일팀에는 평화·화합의 새로운 물결, 새로운 역사라는 거창한 꼬리표가 붙었고 기적처럼 좋은 성적을 내도 그 순간 뜨거웠던 관심은 쉽게 식어버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선수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관계로 남았다.

헝가리 세계선수권대회 이후 5개월 뒤인 2019년 9월, 유은총과 김송이는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다시 재회했다. 그날도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잡은 덕에 휴식시간을 쪼개 수다를 떨 수 있었다.

“다음에 나 또 보게 되면 나한테 손으로 편지를 꼭 써줘.”

유은총이 김송이에게 말했다. 아날로그 감성을 지닌 유은총은 손글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스웨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일팀 경기가 끝나고 한반도기에 남북 선수들이 이름을 적어 간직하자고 제안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내 글씨는 붓글씨체라 글씨를 보면 반할 겁니다!” 김송이는 장난기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야! 일단 써 오고 말해.” 유은총은 김송이의 허세를 일축하며 손편지를 꼭 받아야겠다고 했다.

“살면서 북한 사람을 만날 기회가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저희는 북한 선수들과 친하게 서로 마음을 주고받았잖아요. 그런 면에서 인생관이 많이 넓어진 경험을 한 것 같아요.” 유은총에게 2018년 단일팀은 그렇게 기억됐다.

2018 코리아오픈 탁구대회에 북쪽 선수단을 이끌고 참가한 주정철 북한탁구협회 서기장(오른쪽)이 2018년 7월21일 오후 대전시청 20층에서 열린 환송만찬에서 허태정 대전시장한테서 사진 선물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2019년 평양의 찬바람

2019년 평양에서 탁구 주니어 동아시아 예선전이 열렸다. 그해 5월16일 박창익은 대한탁구협회 전무 자격으로 선수단과 함께 평양공항에 도착했다. 불과 1년 전, 주정철 서기장과 의기투합해 단일팀을 성사시키고 친분을 쌓은 박 전무는 기대감을 안고 평양으로 향했다. ‘내가 코리아오픈 때 인천공항까지 마중 나갔으니 주 서기장도 평양공항에 나와 있겠지.’ 스웨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주 서기장은 박 전무에게 평양에 오면 평양냉면을 사 주겠다고 약속했다. 북한에 친분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박 전무는 예전처럼 북한이 멀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평양공항에 도착한 박 전무는 실망했다. 자신이 평양에 오는 줄 알고 있을 주 서기장은 공항에 나타나지 않았다. 내심 서운했다.

박 전무는 다음날에야 주 서기장을 잠깐 만날 수 있었다. 호텔에서 경기장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았고 오전 10시 시합을 위해서 9시35분께 호텔 로비로 나갔다. 그곳에 주 서기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10분쯤 이야기를 나눴을까. 주 서기장은 그들을 둘러싼 북한 간부 눈치를 보더니 박 전무에게 인사를 했다. “다음에 봅시다.” 그러나 그 뒤 그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체육인의 힘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있구나.’ 그제야 박 전무는 주 서기장의 상황을 이해했다. 탁구 남북단일팀이 성사된 2018년 한반도에는 훈풍이 불고 있었다. 그해 4·5·9월 3차례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고 6월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의, 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반도 종전선언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그러나 2019년 2월 트럼프-김정은 2차 정상회담은 ‘노딜’로 끝났다. 북한의 비핵화와 미국의 제재 완화는 없었다.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는 다시 경색되기 시작했다. 돌고 돌아 다시 원점. 이런 상황에서 주 서기장도 박 전무를 웃으며 맞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남한의 박창익과 북한의 주정철은 단일팀을 구성하면서 인간적인 연을 맺을 수 있었지만, 그 인연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여전히 남북이 분단된 현실에선 아무도 알지 못했다. 대외 변수로 휘청거리는 남북 관계 속에 스포츠 교류는 여지없이 힘을 쓰지 못했고, 박 전무가 방북해도 주 서기장과 맘 편히 마주앉아 평양냉면 한 그릇 먹지 못하는 신세였다.

언제쯤 그들은 평양 술집에 마주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꿈같던 2018년 탁구 남북단일팀 이야기는 또다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히고 있다. <끝> 김지나 작가·<뉴스핌> 기자, 공동기획 팩트스토리

※ ‘남북탁구단일팀 코리아’ 연재를 마칩니다. 작가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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