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온 '관료 전성시대'..개혁 마무리 맡겨도 될까

박현 2021. 4. 2.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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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다음주의 질문][토요판] 다음주의 질문
김상조 전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왼쪽)이 지난 29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퇴임 인사를 마치자 이호승 신임 정책실장이 인사말을 하기 위해 연단에 오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정권 말기가 되자 다시 관료의 전성시대가 돌아오고 있다. 김상조 전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이 물러난 자리를 기획재정부 출신 관료가 물려받고, 다른 경제정책 요직들도 속속 관료들로 채워지고 있다. 역대 정부에서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이기에 더 안타깝다. 적폐청산과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내달려왔건만 개혁을 마무리 지어야 할 중요한 시기에 관료들에게 지휘봉을 맡기는 건 아이러니하다. 고위 관료들 대부분이 이미 기득권 세력화한 탓이다.

관료들이 전진 배치되고 부동산 투기가 모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상황에서 정권 초·중반기 그나마 씨앗을 뿌렸던 개혁적 조처들이 유명무실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정책이 성과를 내려면 개혁 청사진을 가진 정권 핵심부와 실무에 능한 관료들 간의 견제와 균형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이런 구조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책은 법만 만들어놓는다고 결실을 맺는 게 아니다. 구체적 실행 방안은 시행령과 규정, 세칙 등에 담긴다. 제아무리 좋은 취지의 법률이어도 이를 집행하는 세부 방안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용두사미가 되기 십상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는데, 이 작업이 온전히 관료들의 손에 맡겨진 셈이다. 특히 재벌·부동산·금융 등 경제정책 전반의 후퇴가 우려된다.

요즘 관료들은 과거 개발연대 시기의 공직자가 아니다. 옆집에 철이와 순이 같은 가난한 친구를 둔 관료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다. 고위 관료들의 재산공개 내역을 보라. 서울 강남과 세종시에 각각 아파트를 소유하다가 청와대의 다주택 처분 방침에 따라 ‘똘똘한 한채’를 강남에 남기고, 예금은 적게는 수억, 많게는 십수억을 가진 게 요즘 잘나가는 관료들의 전형적 모습이다. 그런 이들에게 서민을 중심에 둔 경제정책이 나오길 바라는 건 연목구어에 가깝다.

관료들의 기득권화 현상은 단순히 사고방식과 이념의 보수성에만 기인하는 건 아니다. 관료들은 민간 경제권력들과 끈끈하게 유착·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통로는 정보와 자리다. 고급정보를 끼리끼리 공유하면서 이른 시기에 목 좋은 곳에 아파트를 장만하고, 심지어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건에서 보듯이 투기까지 한다. 퇴임 이후에는 공공기관이나 유관 협회, 대기업·금융회사 사장 등으로 낙하산을 타고 내려간다. 기재부 관료들이 사용자 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경영자총협회 등의 고위직으로 가고, 금융위원회 관료들이 민간 금융협회장으로 가는 게 대표적이다. 금융위 관료들은 협회장 자리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협회의 2인자 자리인 전무까지 차지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언론이 문제제기를 해도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정권 말기 공직 기강이 이미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유착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으로만 끝나면 걱정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피해를 일반 국민들이 본다는 게 문제다. 금융 분야에서는 대형 금융 스캔들로 번진 사모펀드 사태로 고객들이 7조원에 가까운 손실을 봤다. 사모펀드 사태는 직접적으로는 금융회사의 탐욕이 촉발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관료들이 제대로 된 관리·감독 체계도 갖춰놓지 않은 채 규제를 무분별하게 풀어준 데서 비롯된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관피아(관료+마피아)의 폐해를 이미 신물 나도록 봐왔는데도 우리는 아직 교훈을 얻지 못한 것 같다.

현 정부는 금융 분야에서는 ‘소비자 보호 강화’라는 개혁의 씨앗을 뿌렸다. 지금껏 금융산업 육성이라는 명분 아래 금융회사를 중시해온 정책 기조에서 큰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금융 감독을 책임지는 금융감독원장에 금감원 출범 이래 처음으로 관료가 아닌 민간 출신 개혁 인사(윤석헌 원장)를 앉혔기에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윤 원장은 소비자 피해를 초래한 금융회사 경영진에게 중징계 제재를 내리는 등 강도 높은 개혁 드라이브를 걸어왔다. 이에 금융업계는 강한 반발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모피아(금융 관료)들도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모피아 출신인 김광수 전국은행연합회 회장의 최근 발언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금번 금융 감독 당국의 징계는 법제처와 법원의 기본 입장인 ‘명확성의 원칙’과는 비교적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금융권에서 예측하기가 어렵고 불확실성을 증가시켜 경영 활동을 위축시킬 위험이 높은 것으로 생각한다.”

재·보선을 계기로 개각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관료들에게 맡기면 일이 그럴듯하게 처리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촛불시민들이 요구했던 근본적 개혁의 길은 멀어질 것이다. 그나마 움트기 시작한 개혁의 싹마저도 잘려나갈지 모른다. 이런 우려가 기우에 그치기를 바란다.

박현 경제산업부 선임기자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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