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역사유적탐방] 함양 개평마을과 남계서원

남상훈 2021. 3. 26.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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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봄이 오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계절이다.

봄의 정취와 함께 역사 인물의 향기를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필자는 경상남도 함양에 소재한 개평마을과 남계서원을 소개한다.

남계서원 인근에 있는 함양 개평마을은 하동 정씨 집성촌으로, 가장 중심되는 곳에 정여창의 고택인 '일두고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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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을 배향한 남계서원
코로나19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봄이 오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계절이다. 따사로운 햇볕과 함께 우리의 눈을 맑게 하는 꽃들과의 만남이 즐겁다.

봄의 정취와 함께 역사 인물의 향기를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필자는 경상남도 함양에 소재한 개평마을과 남계서원을 소개한다. 개평마을은 이곳 출신의 성리학자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을 배출한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며, 남계서원은 정여창을 배향한 서원이다. 정여창의 호 ‘일두’는 하나의 좀벌레란 뜻으로, 자신을 낮추어 표현한 것이다. 정여창은 함양 지역을 중심으로 후학들을 양성하였고, 그의 사후에 남계서원을 세웠다. 남계서원은 백운동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유서 깊은 서원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함양 지역 의병 활동을 주도한 곳이었다. 1610년(광해군 2)에 정여창은 김굉필과 함께 성균관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에 배향된다는 것은 최고의 영예였다. 당시 오현으로 문묘에 종사된 인물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었다. 남계서원은 2019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서원 아홉 곳 중 한 곳이기도 하다.

남계서원 인근에 있는 함양 개평마을은 하동 정씨 집성촌으로, 가장 중심되는 곳에 정여창의 고택인 ‘일두고택’이 남아 있다. 일두고택은 정여창의 생가 자리에 지은 건물이다. 지형이 마치 댓잎 네 개가 붙어 있는 개(介)자 형상이라 ‘개평마을’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마을에는 돌담길의 담장이 길게 늘어서 있고, 개울을 따라 60여 채의 전통 한옥이 서로 기대어 다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일두고택의 솟을대문에는 정려(旌閭) 편액이 5개 걸려 있으며, 사랑채에는 ‘文獻世家(문헌세가)’, ‘忠孝節義(충효절의)’, ‘百世淸風(백세청풍)’ 등을 써 붙인 현판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정여창이 실천했던 성리학의 의리와 충절 정신을 계승하여 다수의 효자와 학자를 배출한 가문의 자부심이 드러나 있다. 봄이 오는 길목에 함양의 고택과 서원을 찾아 선비 정신을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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