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의마음치유] 정신과 의사의 일

남상훈 2021. 3. 25.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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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한 분이 "정신과 의사라면 듣기 좋은 말로 위로해주고 희망찬 말도 해줘야죠"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이 분은 듣고 싶었을까? 정확한 원인을 딱 부러지게 짚어주기를 바랐다.

일정한 시간에 자고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기, 세수하기, 산책 5분 하기, 낮에는 누워 있지 않기, 하루 한 줄씩 성경 (혹은 불경) 읽기, 하루 종일 잠옷만 입고 있지 않기, 배고프지 않아도 때가 되면 한 숟가락만이라도 밥 먹기. 이 정도의 활동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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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낙관 우울증 환자 치료엔 걸림돌
일상 변화 유도하며 묵묵한 기다림 필요
환자 한 분이 “정신과 의사라면 듣기 좋은 말로 위로해주고 희망찬 말도 해줘야죠”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이 분은 듣고 싶었을까? 정확한 원인을 딱 부러지게 짚어주기를 바랐다. 언제까지 약을 먹으면 다 나을 거라는 분명한 시간을 알고 싶어했다.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내가 당신을 완전히 고쳐드리겠다”고 말해주기를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 모두에 대해, 그분이 듣고자 하는 답을 못 드렸다. 뜨뜻미지근하게 “당분간 약 드시면서 같이 기다려 봅시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답답해한다. 의학기술이 발달했다지만 아직 마음을 보여주는 기계는 없다. 자기공명영상으로 두개골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지만 정신은 볼 수가 없다. 도대체 우울증이 생긴 원인이 뭐냐고 물어도 “이거다” 하고 짚어주지 못할 때가 많다. 다양한 원인이 발병에 기여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이유로 콕 찍어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때는 진단이 바뀌기도 하니 ‘이 의사를 믿어도 되나’라고 의심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내 능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근원적으로는 우리 마음이 원래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듣기 좋은 말로 희망을 선명하게 그려주면 좋겠지만 이것만으로 치료가 완성될 리 없다. 직설적인 언어로 환자를 아프게 해서도 안 되지만 섣부른 낙관의 언어가 치료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공감만 잘 해준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의사 환자 관계, 즉 ‘라뽀’가 좋으면 치료효과도 좋아진다는 건 분명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치는 않다. 환자도 자기 몫의 노력을 해야 한다. 무리한 걸 하라는 게 아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억지로 하라는 뜻도 아니다. 각자의 상태에 맞춰 실천 가능한, 아주 작은 행동을 쌓아나가야 한다.

일상적이고 소소한 활동을 챙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정한 시간에 자고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기, 세수하기, 산책 5분 하기, 낮에는 누워 있지 않기, 하루 한 줄씩 성경 (혹은 불경) 읽기, 하루 종일 잠옷만 입고 있지 않기, 배고프지 않아도 때가 되면 한 숟가락만이라도 밥 먹기…. 이 정도의 활동이면 된다. “우울증 때문에 아무것도 못한다”고 해버리면 변화는 더디 찾아온다. “우울증 때문에 더 큰 것을 잃었는데, 이따위 활동을 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찮게 보면 곤란하다.

우울한 사람이 우울하지 않게 바뀌려면 마음이 아니라 행동이 변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렇게 말했다. “특정 방식으로 꾸준히 행동함으로써 특정한 자질을 얻을 수 있다. 공정하게 행동함으로써 공정해지고, 온화하게 행동함으로써 온화해지며, 용감하게 행동함으로써 용감해진다.” 작은 행위들이 모여야 나란 사람도 달라진다.

정신과 치료에는 ‘기다림’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 정확히 진단하려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관찰해야 한다. 치료 효과를 얻으려 해도 기다림은 필수다. 시간을 몰아대지 않고, 되풀이되는 좌절과 단념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변화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노라 마음먹는 것. 치유적인 기다림이란 이런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함께 기다려 주는 이가 옆에 있다고 느낄 수 있을 때 ‘어떻게든 살아보자’라고 마음먹게 된다. 정신과 의사의 일이란 고통에 빠진 누군가와 함께 앞으로 일어날 사태를, 비록 그것이 어떨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더 나아질 거란 간절한 바람을 가슴에 품은 채 그저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병수 정신건강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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