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산..사막이 끝나자 '雪國'이 시작됐다

글 신영철 산악문학가 사진 정임수 사진가 2021. 3. 24.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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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철의 산 이야기<1> 시에라네바다산맥
(위)시에라 산 속 꽁꽁 얼어붙은 쌍둥이 호수 파노라마 전경. (가운데)모하비 사막과 눈 덮인 시에라산맥은 서로 다르면서도 잘 어울린다. (아래)고도를 올리자 시에라산맥의 설경이 점점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새 연재를 하는 신영철은 산악문학가이다. 1999년 미주 한국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환상방황의 그늘>로 당선되었고, 2005년 <문학사상>사에 장편소설 <가슴속에 핀 에델바이스>가 당선된, 산을 모티브로 글을 쓰는 소설가다. 열여덟 차례의 히말라야 원정 경험이 있으며, 다양한 매체에 산악 관련 글을 기고해 왔다. 26인의 산악인 인터뷰를 담은 <휴먼 알피니스트>를 낸 바 있다. 글과 산에 관한한 검증된 고수인 그는 미국 영주권자로, 국내외를 막론한 다양한 산 이야기를 월간<山> 독자들에게 풀어낼 예정이다. <편집자 주>
맘모스산 정상 이정표는 1,153피트, 즉 해발 3,369m라고 알려주고 있다.
보름달이 휘황하던 어느 해 겨울이었다. 요세미티에서 산행을 마친 후, 늦은 밤 로스앤젤레스LA로 귀환하던 때였다. 395번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창 밖에는 시나브로 마술이 펼쳐지고 있다. 산악인들 애창곡 ‘설악가’ 노랫말이 실현되고 있었던 것.
‘굽이져 흰 띠 두른 능선길 따라~’라는 가사가 시에라네바다Sierra Nevada산맥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시에라네바다산맥 마루금에 쌓인 눈이 보름으로 차 오른 달빛을 퉁겨내며, 오로라처럼 허공에 떠 있는 풍경. 돌아가신 고령산악회 이정훈 선배가 천불동 눈밭에 반사되는 달빛에서 얻은 노래가 설악가였다.
시에라네바다산맥 동쪽 오웬스 벨리를 달리는 395번 고속도로는 모하비사막Mojave Desert과 잇대어 있다. 사막이며 고원지대였으므로 주변은 온통 누런 색감의 삭막한 지평선. 그러므로 허공에 떠있는 흰색 마루금이 더 도드라질 수밖에. 이런 느낌 때문이었을까. 이 산맥을 평생 예찬하며 요세미티를 국립공원으로 만든 존 뮤어John Muir가 말했다. 시에라네바다는 ‘빛나는 산맥’이라고. 그 산이 부르니까, 나는 간다. Mountain is calling, I must go!
세상을 스마트폰 이전과 이후로 바꾼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그도 시에라네바다산맥을 사랑했다. 그는 요세미티 아와니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존 뮤어의 동료이자, 함께 ‘시에라클럽’을 만든 유명한 안셀 아담스의 사진작품을 애플 본사에 걸었다. 집에도 안셀 아담스의 작품인 ‘시에라네바다의 겨울 일출’을 걸어두었다. 눈 덮인 겨울 시에라네바다산맥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시에라산군 최고봉이자 미국 본토 최고봉인 마운틴 휘트니(4,421m)를 배경으로 선 필자. 중앙의 첨봉이다.
국립공원 세 곳을 품은 산맥
산행 파트너 정임수 작가가 눈 폭탄을 맞았다는 시에라네바다산맥에 가자고 연락해 왔다. 산을 간다는 설렘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 원한다면 늘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산행이 코로나19로 어려워졌다. 언제나 곁에 있던 일상의 산행이 지금은 특별한 일로 다가서는 불편함.
겨울 산행 장비를 챙기며 예전엔 몰랐던 사소한 준비까지 소중하고 기쁜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제철을 맞은 시에라 산 속에서 우리는 3박 4일을 보낼 것이다. 맘모스와 준레익 스키장에서 스키를 타고, 얼어붙어 침묵하고 있을 하늘호수도 오를 것이다.
LA를 빠져 나온 차는 3시간 만에 US하이웨이 395번을 만나 모하비사막을 횡단하고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 모하비 족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사막은 서서히 고도를 높인다. 결국 2,000m까지 높아져 종국엔 고원 사막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다 왼쪽으로 어느 순간 산들이 슬며시 일어나더니 함께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시에라네바다산맥의 시작이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지평선이 이어지는 광활한 사막 풍경. 모하비사막이기에 가능한 풍광이다.
그러다 롱파인이란 작은 마을에서 침봉으로 바뀐 날카로운 산맥의 아득한 정점들을 만난다. 바늘처럼 솟은 그 침봉 중에 미국 본토 최고봉인 휘트니봉Mount Whitney(4,421m)이 있다. 처음엔 휘트니를 구별하기 어려웠는데 몇 번 올랐다고 이제는 한눈에 든다. 1,000km쯤 남북으로 달리는 시에라네바다산맥은 품속에 3개의 국립공원을 안고 있다. 미국 본토에서 가장 높은 휘트니봉을 품은 세쿼이아국립공원. 미국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킹스캐니언립공원. 설명이 군더더기가 될 요세미티국립공원이 그것이다.
눈 많은 시에라산맥엔 알프스를 능가하는 대규모 스키장이 많다.
시에라가 없으면 LA도 없다
황갈색 색감과 햇살 따가운 사막. 키를 훌쩍 키워 정수리에 하얗게 눈을 이고 있는 시에라네바다산맥의 고산준령. 눈이 풍년을 이룬 고산과 사막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흑백 대비가 아니라 황백黃白 구도의 풍경. 사막도 고도를 높이고 산맥도 키를 더 키워가며 설국이 완성되고 있다.
‘눈이 많으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란 한국 속담은 국적을 떠나 보편적이다. 실제로 시에라네바다산맥에 눈이 많으면 상습 물 부족 도시 LA에는 식수가 풍년이다. 시에라네바다산맥은 LA 식수와 농업용수에 주요 역할을 하는 젖줄이다. 눈 폭탄 소식을 듣고 산행에 나선 우리의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겨울동화 같은 설국이 완성되고 있다.
골짜기에 쌓인 눈이 음영陰影으로 준령의 뼈대와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산 능선이 저렇게 날카로웠나? 자주 이 산맥을 찾은 이의 눈에도 새삼스럽다. 한국의 백두대간 지형처럼 시에라네바다산맥도 동고서저東高西低다. 우리가 가고 있는 동쪽에서 보면 산맥은 병풍처럼 한없이 가파르다. 그러나 능선 너머 서쪽은 상대적으로 평탄하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이곳을 ‘이스턴 시에라’ 고원이라 부른다. 캘리포니아 관광홍보물은 이스턴 시에라 자랑을 엄청 하고 있다. 그 중심에 맘모스 레이크시市가 있다.
맘모스산(3,369m)의 이름을 딴 산간도시 맘모스 레이크시는 산악활동에 특화된 명품 도시다. 하늘을 가릴 듯이 솟은 톱날 산봉우리가 에워싸고 있는 맘모스시. 눈에 익어 반가운 시내 입구 환영 문구도 여전했다. ‘산이 부르고 있다The Mountains are calling’는 존 뮤어의 글에서 인용한 명언이다.
맘모스시 환영 안내판엔 ‘산이 부르고 있다’는 존 뮤어의 말이 반긴다.
365일 산악레저의 천국
늘씬한 파인트리 숲에 둘러싸인 맘모스시에서는 곰을 비롯한 야생동물도 쉽게 볼 수 있다. 지금 곰은 설국을 이룬 시에라 산 속에서 깊은 동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문득 겨울잠을 잘 수 없는 사슴은 깊은 눈 속에서 무얼 먹고 사는지 걱정도 든다.
맘모스산 너머에 존경해 마지않는, 존 뮤어의 이름을 딴 유명한 존 뮤어 트레일John MuirTrail·JMT이 있다. 맘모스는 그 트레일의 들머리, 날머리이기도 하다. 수많은 등산로가 여기서 시작되고 여기서 끝난다. 멕시코에서 캐나다 국경을 연결하는 4,286km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도 바로 뒷산을 지나고 있다.
한국에서 많은 산악인들이 열망하는 ‘걷는 자의 꿈’ 358km의 존 뮤어 트레일. 그 트레일 종주에 맘모스시는 중요하다. 야생의 산속으로만 이어지던 트레일이 이곳에서 잠시 문명에 고개를 내밀기 때문. 맘모스시는 미국 서부에서 가장 큰 산간 리조트다.
에워싼 산 속은 빙하가 만든 보석 같은 호수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우리가 올라야 할 조지호수Lake George(2,819m) 역시 하늘호수라 부를 만했다. 눈이 깊어 못 간다면 쌍둥이호수Twin Lakes로 바뀌겠지만 그곳 높이도 2,610m나 된다.
겨울 맘모스에는 등산과 스키뿐 아니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동계 스포츠가 펼쳐진다. 많은 사람들이 알프스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바로 시에라네바다산맥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방문객은 연 300만 명 가까운데 놀랍게도 여름에 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는다. 사계절을 망라해 낚시, 등산, 마운틴 바이킹, 하이킹, 곤돌라, 승마, 관광, 보트타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연평균 강설량이 10m가 넘는 맘모스는 겨울만의 리조트 마을이 아니었다. 맘모스시의 별명은 이어 라운드year round, 즉 연중무휴 리조트인 것이다.
맘모스시에는 한인들이 별장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 우리도 선배의 별장에서 기거하며 스키와 산행을 시작했다. 맘모스의 특징 중 하나는 노르딕 스키Nordic Ski를 탈 수 있다는 점이다. 무수한 호수와 호수를 도는 도로는 눈에 파묻혀 갈 수 없지만 노르웨이 사람들처럼 노르딕으로 크로스컨트리가 가능하다. 차량으로 스키가 수월하게 갈 수 있도록 도랑을 파 놓아 초심자도 즐겁게 이용한다. 스키와 신발을 대여해 주는 상점도 있어 우리도 종일 동화 같은 설경 속에서 눈투성이가 되었다.
이튿날은 하늘호수 등산에 나섰다. 산천이 푸르렀던 지난여름 우리는 이곳에서 등산과 수영을 하며 여름을 보냈다. 그런데 불과 6개월 만에 온 세상이 하얗게 바뀌어 버렸다. 세월 참 빠르다. 곧 음력설이 지나니 새싹이 돋아 날 봄도 머지않다. 소중하지만 공기의 고마움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산행이 소중하다는 걸 새삼 안다.
상점에서는 설피도 빌려 줬는데 그걸 무시한 게 못내 후회스럽다. 눈은 크러스트가 되어 있지 않아 발이 푹푹 빠졌다. 우리의 고군분투를 비웃듯 설피를 신은 미국인이 추월해 간다. 등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 상태라면 조지호수까지 산행은 불가능하다.
쌍둥이호수에 도착한 후 산행을 접었다. 호수는 꽁꽁 얼어붙었다. 호수를 에워싼 늘씬한 파인트리 숲 너머 무수한 시에라 침봉들이 병풍을 쳤다. 곰이 동면을 하듯 사람이 들어 설 수 없는 시에라네바다산맥은 깊은 침묵에 빠져 있다. 일찍 눈이 오면 10월부터 인적이 끊기고 이듬해 6월이 되어서야 입산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5개월 정도 입산이 가능할 때 JMT와 PCT 종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시에라네바다산맥의 고봉 역시 그 계절에만 등반이 가능하다.
‘캘리포니아 포티너스Fourteeners’라는 용어가 있다. 히말라야 14좌처럼 해발 1만4,000피트, 즉 4,200m를 넘는 산 15봉(관점에 따라 12개만 포티너스로 인정하기도 한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중 13개봉이 우리가 이곳까지 달려 왔던 395번 고속도로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화이트 마운틴만 건너편 산군에 있을 뿐, 휘트니 등 12개봉은 시에라네바다산맥에 솟아 있는 것이다.
시에라산맥의 또 다른 스키장 준레익의 작지만 아름다운 산간마을.
하루 종일 차 한 대 구경 못 하는 포장도로
주관적이지만, 나는 시에라네바다산맥을 능가하는 풍경은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세월 참 무던히도 지구별 산을 찾아 쏘다녔다. 그럼에도 시에라네바다산맥을 으뜸으로 꼽고 그렇게 글을 쓰고 단언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존 뮤어 선생처럼 스스로 시에라네바다산맥 예찬론자가 된 이유가 있다. 산이 높은 만큼 골도 깊은 시에라네바다산맥은 그 자체가 보물상자이기 때문.
부자 나라답게 하루 종일 차 한 대 지나지 않는 포장도로를 만들어 산의 속살로 접근하기 쉽다. 장엄한 풍경 속으로 쉽게 들어 설 수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산에 관한 종합선물을 받고 본 느낌이 각별했다. 그건 바로 시에라네바다산맥이 주는 울림이었다.

'본 기사는 월간산 3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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