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행복은 햇볕을 타고 온다

남상훈 2021. 3. 22.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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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오신 어머니
그 대가로 소박한 집 한 채 지녀
타인 성실함 악용 부 축적하는 이들
평범한 이웃들의 분노 두려워해야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둘러싼 정치·경제적 사태에 관해서 말을 아끼려 한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말한 ‘침묵에 대한 권리’가 그 이유이다. 침묵을 지키는 자는 지배되지 않고 자유롭다.

사안 자체가 아니라 이 시대의 한 개인으로서 나와 내 이웃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텍스트가 아니라 콘텍스트에 관한 이야기이고, 중심이 아니라 주변이 받는 반향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들은 아무 권력이 없고, 정보에서 배제되었으며, 열심히 납세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보살피며, 행복하지 않아도 생은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성실함이 이용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부의 불법적 추월차로에 오를 생각은 없다. 그런 것은 자기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은 자신을 소외시키는 일이다.
한귀은 경상대 교수·국어교육학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이다’, ‘상향비교와 하향비교를 적절하게 하라’, ‘필요하지 않은 돈을 벌기 위해 필요한 것을 거는 짓은 하지 마라’. 이런 말들이 가진 미덕이 분명 있다. 그러나 이 미덕이 악용되기도 한다. 누군가가 성실하게 살아갈 때, 누군가는 다른 이의 성실함을 악용하여 자기 이득을 챙긴다.

권력과 정보의 카르텔을 이용해 초법적으로 돈을 번 자들도 여기에 속한다. 이 사안을 두고 개인의 도덕심을 문제삼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 누구라도, 그 위치에서, 도덕심의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다면, 그 제도와 시스템이 잘못된 것이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그 위치에서는 타당하고 공정할 수밖에 없는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라고 정치와 행정이 있는 것이다. 위정자들은 국민의 도덕심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도덕심을 작동시킬 필요가 없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불가능하다면, 그 시스템은 해체되어야 한다. 공사 직원 전체를 대상으로 윤리교육을 해야 한다는 말에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윤리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직원에 대한 도덕적 불신이 전제되어 있다. 그 직원 각자도 개인이다. 모든 직원이 부당이익을 챙긴 것이 아니다. 지금 사태에 대하여 개별 직원 또한 비참함과 자괴감을 느낄 것이다. 성실하게 자기 임무에만 충실했던 직원 또한 이번 사태의 피해자 중 하나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분노다. 분노를 일으키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인가. 부의 초양극화다. 부동산도, 주식도, 암호화폐도, 권력자의 초법적인 부당이익 착취도 모두 부의 초양극화로 수렴되고, 대다수 우리 이웃은 이들의 암묵적 담합에서 배제되어 있다. 분노는 쌓이고 있지만 네트워크를 타고 분출될 뿐, 광장으로 나오지는 않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다. 그렇다면, 팬데믹이 끝나면 어떻게 될까.

‘칠드런 오브 맨’은 2027년을 보여주는 SF영화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2006년 작이다. 상황 설정상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 과장에 진실이 담겨 있다. 주인공 부부는 2007년 플루(flu)로 아들을 잃었다. 경제적 불평등, 부의 초양극화는 극에 달한다. 이로 인한 분노는 폭동과 테러로 이어진다. 그런 와중에도 극소수 기득권자들은 안전하고 풍요롭게 자기들만의 세계를 즐긴다. 미래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싸우거나 무기력하게 살거나 그것조차 지치면 자살한다. 그러나 영화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영화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인에 대한 만인의 보살핌’으로 변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 일인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인을 보살피는 만인에게서 진정한 희망을 본다. 그것은 우리 이웃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오신 대가로 소박한 집 한 채를 가지셨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아버지와 낫살 먹은 자식들과 늙은 개를 보살피신다. 어머니에게 집과 땅은 누군가를 보살피기 위함이다. 부동산도, 주식도 모르시고, 다만 아끼는 것만 잘하신다.

우리는 매주 한 번 산청에 간다. 농사를 지은 지 5년째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단연 먹는 일. 나이든 딸은 어머니가 해주신 밥을 맛있게 먹는다. 농사일은 뒷전이다. 그래도 당근, 양파, 마늘, 비트, 도라지, 감자, 고구마는 풀 속에서 나름대로 자랄 만큼 자란다.

첫해는 룰을 모르는 입문자가 게임에서 이기듯 고구마 수확을 제법 했다. 그러나 보관법을 몰라 다 썩혀 버렸다. 둘째 해는 풀을 줄여 보겠다고 키운 염소가 고구마 줄기를 다 드시는 바람에 실패했다. 셋째 해는 역시 놀기만 좋아하는 농사꾼이 풀을 뽑지 않아서 실패했다. 넷째 해는 풀을 안 뽑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예상외로 더 심각하게 실패했다. 올해는 물론 잘해 볼 생각이 별로 없다. 나오는 대로 나눠 먹으면 그만이다. 적절한 실패가 우리의 목표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더 늙어서 아파 누워 있으면 니하고 농사지은 거만 생각날 거 같다.” 무뚝뚝한 딸은 울컥하는 걸 숨기느라 괜히 딴소리를 한다.

‘행복은 햇볕을 타고 온다’는 이반 일리치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의 오마주다. 어머니와 농사를 지으면서 행복을 느끼게 된 순간에 문득 포착한 문장이기도 하다.

한귀은 경상대 교수·국어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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