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마지막 농부'.."밭 앞이 아파트 숲 돼도 땅 팔 생각은 안 해봐"
[경향신문]
그의 이마와 두 뺨에는 잘 고른 이랑 같은 긴 주름들이 깊이 파여 있다. 60년 가까운 긴 세월 햇볕에 그은 피부 곳곳에는 검버섯이 씨앗처럼 박혀 있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그리고 자신까지 그는 한평생을 ‘농부’로 살아왔다. 아픈 무릎 탓에 밭으로 가는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평생 흙과 함께한 그의 두 손은 돌처럼 단단했다. 이희선씨(82)는 서울 송파구에 남은 ‘마지막 농부’다.
지난 19일 송파구 방이동에서 이씨를 만났다. 그가 농사짓는 땅만 2492여㎡ 규모에 달한다. 주변에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가 닦이면서 벼농사를 짓던 논은 밭으로 변했다. 그는 경기도에서 나서 자랐다. 그가 태어난 ‘경기 광주군 중대리’로 불리던 곳은 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관할주소지가 ‘서울’이 됐다. 당시 광주군 중대리가 현재의 송파구 오금동이다. 그가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땅도 송파구 방이동으로 편입됐다.
이씨가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시작한 것은 1964년, 군대를 제대한 25세 무렵이었다. “내가 원래는 군대에 말뚝을 박으려고 했어. 군에 입대해보니까 체질인 거야. 상사들도 군에 말뚝을 박으라고 계속 권유를 했는데 그러질 못했지. 내가 장남이라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어길 수가 없었어.”
이씨는 군 입대 전부터 농사일을 거들었지만 가업을 잇기 시작한 이후로는 단 하루도 쉴 수가 없었다. 해가 뜨면 소를 끌고 나와 쟁이질하고, 논에 물을 댔다. 아내도 매일 나와 일손을 거들었다. 그렇게 세 자녀를 키워냈다. “자식들이야 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제 살길 찾아서 독립했지. 그런데 그 녀석들은 여기에 오질 않아. 김장배추도 여기 밭에서 길러서 만들어 먹었어. 애들이 ‘김치 좀 주세요’ 하니까 다 줬지.”
그가 평생 땅을 일구는 동안 주변 환경은 급격히 변했다. 1988년 6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의 밭 앞으로 5540가구 규모의 올림픽선수기자촌 아파트가 들어섰다. 당시로서는 최대규모로 꼽히는 대단지 아파트였다. 그의 땅 일부가 아파트 앞 도로에 편입되면서 3.3㎡당 8만원을 받기도 했다. 이후에도 계속 주변에 도로가 놓이고, 크고 작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이씨에게 ‘땅을 팔고 편히 살고 싶지는 않았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지금이야 내가 몸이 이렇게 아프니까 농사짓는 게 힘들어진 거지,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
이씨의 땅은 그린벨트로 묶여 있다. 도시계획상 개발제한구역 및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애초에 건물이 들어설 수 없는 땅이다. 이 때문에 주변이 발전하는 동안 그의 땅은 개발에서 제외됐다. 이씨는 그게 서운하거나 화나지는 않았다고 했다. ‘원래 농사짓던 땅이었으니까’ 대대로 농사꾼으로 살아온 삶을 바꿔볼 생각도 없었다. 이씨는 지금도 매일 아침 9시면 아내와 함께 오토바이를 몰고 밭으로 나온다. 밭에는 대파와 시금치, 쑥갓 등을 심었다. 곧 고추와 감자, 강낭콩을 심을 예정이다. 이씨는 그러나 “내가 언제까지 밭에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오랜 농사일에 몸이 지친 탓이다. “자식들은 각자 일이 있으니 이 땅에서 농사를 짓는 건 내가 마지막이겠지.” 물론 그 마지막이 언제가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개발이익을 노리고 ‘가짜농부’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짜농부’는 오늘도 밭을 고르고, 씨앗을 뿌린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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