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현실화하는 '백신의 정치화'

이귀전 2021. 3. 21.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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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접종, 일상 복귀·국운 직결
中 '백신 여권' 자국 제품 한정
美·EU도 백신 활용 이기적 행태
팬데믹 속 인류애 발현 욕심인가

중국 정부로부터 며칠 전 외국 특파원들에게 연락이 왔다. 외국 특파원 대상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신청받겠다는 것이다.

접종 여부를 놓고 고민이 됐다. 중국에서 제공하는 백신은 자국에서 개발한 4종류의 백신 중 하나다. 신뢰 문제와 효용성 사이에서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고 있다. 비용은 2회 접종 기준 180위안(약 3만원)이다.
이귀전 베이징 특파원
시진핑 국가주석을 비롯해 중국 고위층 중 자국 백신을 맞았다는 얘기는 없다. 이달 초 베이징에서 열린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에서 온 5000여명이 백신을 접종했다고는 했지만, 시 주석 등 고위층 포함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백신에 대한 불신 탓인지 중국의 백신 접종률은 100명당 4명꼴로 미국 35명, 영국 42명에 비해 매우 낮다.

만약 아스트라제네카나 화이자, 모더나 등의 백신이라면 고민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의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등이 이 백신 중 하나를 접종했다. 문재인 대통령이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도 공식적으로 접종 의사를 밝혔다. 어느 백신이든 불안감이 있는 상황에서 지도자들이 나서는 것은 사회적 불안을 낮추는 데 일정 부분 효과가 있다.

반면, 백신의 효용성을 고려하면 맞아야 할 듯도 싶다. 우선 백신을 접종하게 되면 중국 본토 내 이동에 있어 제약이 적어질 것이다. 향후 취재를 위해 홍콩, 마카오 등을 오갈 때도 자가격리가 면제될 가능성이 있는 등 현재보다 이동이 더 편해질 듯싶다. 지난 1년간 중국 도착 후 2주간 격리, 수차례 코로나19 검사 등을 겪으며 일상의 소중함을 절실히 체감했다.

개인에게 ‘일상으로의 복귀’를 가능하게 해주는 백신 접종은 국가로 보면 나라의 명운과 직결된다.

코로나19 사태로 지난해 전 세계 경제는 최악을 기록했다. 여행업은 멈춰 섰고 제조업과 서비스업 등 다른 업종도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국가별로 보면 지난해 주요 국가 중 중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나라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그나마 작년엔 다른 국가들도 다 같이 힘들다는 점에서 상대적 박탈감은 덜했다.

문제는 올해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일부 국가들이 백신을 활용해 국제사회에서 자국 입지를 높이거나 이익을 취하는 등 ‘백신의 정치화’를 본격화하고 있다.

중국은 ‘백신 여권’을 추진하며 대상 백신을 자국 제품에 한정했다. 입국 비자 발급을 완화하고, 향후 격리가 면제될 수 있는 ‘백신 여권’을 자국 백신 접종자에게만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중국 백신을 승인하지 않은 국가를 대상으로는 자국 백신 접종 시 비자 발급을 완화하는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한국, 일본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경제적으로 밀접한 국가에 대해 자국산 백신 도입을 ‘강요’하는 행위로 비칠 수 있다. 중국 외교부는 최근 “백신 민족주의와 면역 장벽을 만드는 것은 물론 백신을 정치화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반대한다”고 밝혔지만, 정작 중국이 앞장서 ‘백신장성’을 세우고 나선 모양새다.

유럽도 큰 차이가 없다. 유럽연합(EU)은 백신 여권을 추진하면서 유럽의약품청(EMA)이 인정한 백신만 허용했다. EMA는 중국과 러시아 등의 백신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다만 회원국이 각자 다른 백신을 승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권은 허용했다. 얼마 전까지 한 식구였던 영국에서 EU로 보내는 백신 공급이 줄자, EU는 영국으로 수출하는 백신 공급 차단을 경고한 바 있다. ‘백신의 정치화’를 피해야 한다고 말한 국가들이 제일 앞장서는 형국이다.

미국 등 주요국들이 백신을 선점하면서 우려됐던 국제사회에서의 ‘백신의 정치화’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백신 접종과 치료제 투약이 늘면 코로나19에 대한 불안감은 줄어들겠지만, 국가 간 이기적 행태는 되레 늘 듯싶다. 절박할 때 본성이 부각되는 법이다. 인류가 처음 접한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국면에 극한의 이기주의보다 인류애가 발현되길 원하는 것은 욕심일까.

이귀전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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