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재 또 악재, 흔들리는 박영선 반전카드 있나
[경향신문]
4·7 재보궐 선거를 위한 후보자 등록이 3월 18일 시작됐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입장에서 첫 시작은 쉽지 않다. LH 임직원 투기 의혹은 초대형 악재였다. 나쁘지 않았던 판세가 한순간에 뒤틀렸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나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 둘 중 누가 나서더라도 박 후보를 앞선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3자 구도로 간다 해도 박빙이다.
민주당과 열린민주당, 시대전환의 범여권 단일화 경선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지난 3월 17일 박 후보는 김진애 열린민주당 후보를 꺾고 단일 후보로 낙점됐다. 하지만 컨벤션효과도 LH 악재에는 기를 못 썼다.
돌파구를 찾기 위한 박 후보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LH 특검’과 ‘3기 신도시 토지소유자 전수조사’ 강수를 던졌다. 디지털 도시와 그린 도시 등 간판 공약 대신 지역 밀착형 공약으로 민심 잡기에 나서고 있다. 달라진 박 후보의 전략은 지지율 반등을 이뤄낼 수 있을까.
■예상치 못한 ‘디지털’ 공약의 흥행 부진
“하나는 디지털 서울로의 대전환이고 또 하나는 그린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디지털 플러스 그린, 이것이 서울의 방향입니다(3월 12일 JTBC 정치부회의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토론). ‘디지털’은 박 후보의 공약을 아우르는 단어다. 디지털 대전환이라는 슬로건 아래 블록체인(분산형 데이터 저장 기술) 기반 스테이블 코인(KS-코인)을 발행과 프로토콜(protocol) 경제 도입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박 후보의 공약은 재개발·재건축, 세금 부담 경감 등이 단골소재로 나오는 기존 선거 공약 문법과는 달랐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시절 경험을 녹여내 혁신 이슈를 선점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공약에 대한 호평은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왜일까.
박 후보의 디지털 공약 가운데 핵심 정책은 KS-코인이다. 블록체인 기술과 원화 가치에 기반을 둔 암호화폐로 결제·송금 수수료 없이 서울의 온·오프라인 상점에서 사용할 수 있고, 지방세 납부에도 쓸 수 있는 스테이블 코인이다. 스테이블 코인은 가격 변동성이 큰 비트코인 등 다른 암호화폐와 달리 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가치고정형 암호화폐다. KS-코인만 놓고 보면 새로운데 혜택은 익숙하다. 결제·송금 수수료 무료화, 세금 납부는 이미 서울시에서 만든 제로페이와 은행 모바일 뱅킹, 민간 간편 송금·결제 앱을 통해 쓰고 있는 상용화된 서비스다. 류한석 류한석 기술문화연구소장은 “블록체인 기반 암호화폐라면 해당 코인이 단독으로 제공하는 혜택이나 가치가 있어야 한다”며 “하지만 KS-코인에서는 새로운 가치를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스테이블 코인은 법정화폐 담보 방식으로 발행된다. 서울시가 보유한 원화만큼만 가상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는 의미다. 블록체인 보안 전문기업 웁살라시큐리티의 김형우 대표는 “서울시가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려면 시 자산이나 세금으로 충분한 예치금을 마련해야 한다”며 “적지 않은 예산이 투입되는 프로젝트로 블록체인 업계에서는 환영할 만한 공약이지만 서울시민 입장에서 보면 투입 예산 대비 효용성이 낮은 사업이다”라고 평가했다.
박 후보가 제안한 디지털 공약의 한 축은 프로토콜 경제다. 프로토콜 경제는 이른바 ‘참여형 공정경제 시스템’으로 플랫폼에 모인 참여자들이 합의를 통해 정한 프로토콜(규약)에 따라 발생하는 이익을 공정하게 나누어 갖는 차세대 경제 모델을 뜻한다. 요약하자면 블록체인 기술과 암호화폐를 기반으로 조성된 경제 생태계다. 박 후보는 독점 폐해 논란을 빚고 있는 플랫폼 경제의 대안으로 프로토콜 경제를 꼽는다. 예컨대 배달의 민족(플랫폼)의 성장에 기여한 라이더들도 기여도에 비례해 암호화폐(시큐리티 토큰)를 통한 보상 배분을 받는다. 보상 내역과 배분 과정 등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된다. “프로토콜 경제에서는 갑과 을이 사라지고 소비자와 노동자 모두 공정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책 <박영선과 대전환> 발췌)
문제는 프로토콜 경제의 필요성이 정작 현장에 스며들지 못한다는 점이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은 “정치인의 언어로 프로토콜 경제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플랫폼 종사자들은 프로토콜 경제가 왜 필요하고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정말 플랫폼 노동자에게 필요한 정책이라면 직접 우리를 만나 설명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LH 투기 의혹, 우세에서 열세로
디지털 대전환 공약이 흥행하지 못한 데는 LH 임직원 투기 악재도 컸다. 이 의혹은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됐다. 박 후보는 3월 12일 LH 사태 관련 민주당에 특검 수사를 건의하면서 “서울시에서 투기라는 두 글자가 다시는 들리지 않도록 제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며 강경 메시지를 내놨다. 박 후보의 발언은 강한 워딩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했다. 같은 시기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여당에서 강경 대책을 쏟아내 메시지가 분산됐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의 분노를 직시해 부동산 적폐를 청산하고 사회의 공정을 바로세우는 계기로 만들자”며 한동안 언급하지 않던 ‘적폐 청산’을 다시 화두로 던졌다. 3월 14일에는 정세균 국무총리의 ‘LH 임직원의 토지취득 금지’ 조치 발언이 미디어를 도배했다. 최영일 시사평론가는 “박 후보의 특검 제안과 강경 발언 타이밍은 나쁘지 않았다. 공정에 대한 열망을 어필하고 ‘내 자식 내가 먼저 때린다’는 전략을 택한 것도 현명했다. 다만 효과가 없었다는 게 문제다. 대통령부터 국무총리, 원내 대표까지 다 같은 전략을 취하다 보니 차별화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LH 사태 이후 박 후보의 지지율은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3월 15일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가 문화일보 의뢰로 지난 13∼14일 서울 유권자 103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신뢰수준 95%, 표본오차 ±3.1%포인트) 3자 대결에서도 박 후보(33.3%)는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35.6%)에게 뒤진 것으로 집계됐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25.1%를 기록해 뒤를 이었다. 양자 가상 대결에서는 안 후보(55.3%)가 박 후보(37.8%)를 크게 앞섰고 오 후보(54.5%) 역시 박 후보에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피해자는 3월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박 후보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와 선거운동본부에 참가한 남인순·진선미·고민정 의원의 퇴출을 요구했다. 앞서 거대 담론을 담은 공약을 지우고 지역 공약으로 바닥 민심 잡기 전략으로 선회하려던 박영선 후보 입장에서는 박원순 전 시장 악재에 발목을 잡힌 셈이다. 3월 17일 박 후보는 페이스북을 통해 피해자에게 사과의 뜻을 전하고 “저희 당 다른 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두 제게 해달라. 제가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박 후보의 사과는 오히려 성난 여론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국민의힘뿐만 아니라 정의당도 박 후보의 무성의한 SNS 사과를 비판했다. 조혜민 정의당 대변인은 논평에서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절두산 성지에 두 손 모아 기도할 것이 아니라 기자회견장에 서서 공식적인 사과 입장을 밝혀야 한다”며 “어떻게 짊어지겠다는 것인지 당 차원에서의 명확한 입장을 내놓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원순 프레임에 발목
박 후보에 대한 언론의 관심도 박 전 시장 이슈로 몰렸다. 박 후보는 3월 18일 서울 관악구에서 지역 공약을 발표한 뒤 기자들과 만나 “제가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겠다”는 뜻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짊어지고 가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즉답을 피했다. 남인순·고민정·진선미 의원을 처벌하거나 캠프에서 퇴출하지 않겠다는 의사로 읽혔다. 하지만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이날 오후 고민정 의원은 서울시장 선거운동본부 대변인직에서 사퇴했다. 고 의원은 SNS에 “저의 잘못된 생각으로 피해자에게 고통을 안겨드린 점 머리 숙여 사과한다”며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캠프 대변인을 내려놓는다”고 밝혔다. 이어 남인순, 진선미 의원도 사퇴의사를 밝혔다.
이들 의원의 사퇴에도 불구하고 박 후보의 선거 레이스는 험난할 것으로 보인다. 2차 가해 논란을 빚은 의원들의 사퇴를 두고 극렬 지지층 사이에서 ‘선거를 위해 박원순을 버렸다’며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 차원의 보편적 재난지원금 지급 공약 카드가 남아 있긴 하지만 약발이 얼마나 먹힐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거까지 20여일이 넘는 반전을 위한 시간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야당도 단일화를 놓고 혼란스럽다. 최영일 시사평론가는 “LH 투기 악재가 터진 상황에서 늦어도 선거 일주일 전까지는 반전 모멘텀을 만들어야 하는데 주변 여건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며 “현재로서는 토론에 강점이 있는 후보 개인 역량에 기대 실전 토론 과정에서 지지율 회복을 노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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