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 주문하다 울었다는 엄마.. 남의 일 아니네
무인단말기 앞에서 쩔쩔
코로나 신종 스트레스
“어르신 분들은 지문이 닳아서 무인 민원 발급기에서 지문 인식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저번에 현장 실습 갔을 때, 열 분 중에 세 분은 안 돼서 돌아왔거든요.”
17일 경기 성남시 평생학습관. 디지털 문해 교육 강사 노승유씨가 키오스크(무인 단말기)를 쓸 때 불편한 점을 알려주자 60세 이상의 학생들 사이에서 “맞아! 맞아!” 공감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20여명의 학생은 이날 패스트푸드점·카페 키오스크에서 주문하는 법을 배웠다.
수업을 마치고 박기자(67)씨는 서울 청량리역에서 만난 노부부 이야기를 꺼냈다. “식당 앞 키오스크에서 30분을 헤매고 있더라고요. ‘취소’나 ‘되돌리기’라고 적혀 있질 않으니까 어디를 눌러야 하는지 모르더라고요. 도와주고 싶은데 나도 할 줄 모르고....” 이명섭(72)씨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몇 번 써봤는데 처음엔 잘못 누를까 봐 불안해서 더 당황하게 되더라”면서 “시간을 주면 천천히 따라갈 수 있는데 젊은 사람들한테 미안하고 눈치가 보였다”고 했다.
◇무인 보시함까지… 급증하는 키오스크
최근 트위터에선 키오스크를 다루지 못해 빈손으로 집에 돌아온 엄마의 사연이 1만7000회 넘게 공유되며 화제가 됐다. 작성자는 “엄마가 햄버거 먹고 싶어서 주문하려는데 키오스크를 잘 못 다뤄서 20분 동안 헤매다가 집에 돌아왔다”면서 “(엄마가) 말하다가 ‘엄마 이제 끝났다’며 울었다”고 썼다. 어르신뿐 아니라 젊은 층에서도 “패스트푸드점 키오스크는 젊은 사람도 쓸 때마다 헤맨다””UI(사용자 환경) 디자인이 직관적이지 않아서 젊은 사람한테도 어렵다” 등의 반응이 쏟아졌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비대면 문화가 확산하면서 아르바이트생 대신 키오스크를 도입하는 매장들이 급증했다. 숙박 플랫폼 업체 ‘야놀자’는 자사 키오스크 판매량이 “코로나 이후 월평균 63%씩 증가했다”고 했고, 병원 예약 플랫폼 ‘똑닥’도 지난해 12월 자사 키오스크를 새로 도입한 병원 수가 전년 대비 13배 증가했다고 밝혔다. 수요가 커지자 삼성전자와 CJ올리브네트웍스 등 대기업까지 키오스크 사업에 뛰어들었다.
키오스크는 휴대전화 매장·호텔·전통시장까지 파고들었다. 조계사는 국내 종교계 최초로 기부금을 현금이나 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 ‘키오스크 보시함’을 설치했다.
그러나 동네 카페나 음식점에서도 키오스크를 쉽게 볼 수 있게 되면서 ‘키오스크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이도 늘고 있다. 인건비를 줄이고 갑질 고객을 방지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몇몇 키오스크들은 직원이 도와줘야만 알 수 있는 불편한 시스템 때문에 원래 목적이었던 효율성을 놓쳤다는 비판이 나온다.
◇젊은 사람도 어려워서 헤맨다
16일 손님이 밀려드는 점심 시간, 서울 중구의 한 패스트푸드점. 키오스크 앞에 선 직장인 김모(29)씨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햄버거 세트를 선택하고, 감자튀김과 음료수 종류까지 골랐건만 ‘주문 완료’ 버튼이 없다. 파르르 흔들리는 손가락으로 완료 버튼을 찾아보지만 ‘취소’와 ‘장바구니 추가’ 버튼뿐이었다. 기다리던 뒷사람이 조용히 다른 줄로 옮겨가는 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장바구니 추가 버튼을 눌렀더니 키오스크는 “함께하시면 좋은 메뉴”라며 추가 주문을 권했다.
스마트폰에는 익숙하지만 패스트푸드점 키오스크는 처음이라는 김씨는 “세트는 묶어서 파니까 세트 아닌가. 왜 기본 구성품인 감자튀김과 콜라까지 일일이 선택해야 하냐”며 짜증을 냈다. “말로 주문하면 30초 만에 끝날 텐데 바쁜 시간에 어떤 점원이 추가 메뉴까지 추천하고 있겠어요.”
이날 20~30대 손님 10명의 키오스크 이용 시간을 쟀더니 평균 1분 44초가 걸렸다. 대부분 13~16번 화면을 누른 끝에 주문을 마쳤다. 키오스크가 반응하지 않아 여러 번 화면을 누르는 사람, 메뉴를 못 찾겠는지 화면 위에서 헛손질하는 사람도 보였다. 또 다른 30대 직장인 고객은 “소비자 편의를 위하는 척하지만, 자꾸 추가 주문을 요구하면서 결제를 지연시켜 대인 주문보다 훨씬 비효율적”이라면서 “실제 사람이 주문을 어떻게 받는지 생각해보고, 그에 맞춰 키오스크를 만들면 좋겠다”고 했다.
◇전문가도 키오스크 주문에 실패한다
2019년 한국정보화진흥원이 수도권 키오스크 800대를 조사한 결과, 정보 취약 계층의 접근성 수준은 평균 59.8점이었다. 영화관·공항·터미널·종합병원 등 대부분 장소에서 60점을 넘지 못했고, 음식점·카페·패스트푸드 가게가 50.5점으로 가장 낮았다. 은행(74.8점), 관공서(70점)는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홍경순 한국정보화진흥원 수석연구원은 “점원에게 주문할 땐 ‘세트 주세요’ 하면 되는데, 키오스크에선 불필요한 선택지가 많다”고 했다. “키오스크 사용법도 천차만별이라 가게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 익혀야 하니, IT 기기 습득이 느린 어르신들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죠.”
고령자의 키오스크 사용 경험을 연구한 최종훈 이화여대 디자인학부 교수는 “부끄럽지만 UX(사용자 경험) 디자인 전공자인 저조차 키오스크 주문에 실패한 적이 있다”고 했다. “어르신들이 떠올릴 수 있는 메뉴는 한정적인데 지나치게 많은 메뉴가 펼쳐지니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답변이 가장 많았고요. 유행에 따라 버튼의 테두리를 없애는 디자인을 쓰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일반 글자인지 눌러야 하는 버튼인지 알 수 없다는 문제점도 있었습니다.” 최 교수는 “고령자를 위해 모든 메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종이 메뉴판을 비치해 미리 숙지하게 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했다.
교육용 키오스크를 개발한 지아이에듀테크의 박윤오 이사는 “어르신은 키오스크 문화 자체가 낯설기 때문에 화면 크기나 버튼 모양이 조금만 바뀌어도 포기하시는 경우가 많다”면서 “정부에서 고령층도 쉽게 쓸 수 있도록 표준화된 키오스크 권장안을 제공해주면 매번 새로 익혀야 하는 어려움은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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