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뒤섞이고 교차하는 편곡의 세계

신예슬 음악평론가 2021. 3. 2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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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넷플릭스 오리지널 <브리저튼>은 19세기 영국 귀족들의 화려한 사교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일견 평범한 사극 같아 보이지만, 이 드라마에는 잘 벼린 동시대적 감각이 곳곳에 놓여있다. 제작진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서사에서도 사랑과 결혼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모두의 선망을 받는 남자 주인공과 여왕 캐릭터를 흑인 배우로 캐스팅해 드라마를 역사와 픽션 사이의 팽팽한 줄 위에 놓아둔다. 실존 인물이었던 이들까지 다른 인종으로 캐스팅하는 것이 타당하냐는 의문도 제기됐지만, <브리저튼>의 원작자인 줄리아 퀸은 “역사적 사실에 상상을 더해 <브리저튼>이 현실 세계와 비슷해졌으며 ‘세상이 이렇게 돼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해줄 수도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나 또한 역사 속 이야기를 다룬다고 해서 현재가 지향하는 태도를 무조건 지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드라마를 보는데, 음악이 귀에 들어왔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음악의 상당수는 오케스트라곡이나 현악사중주였다. 19세기 영국 이야기인 만큼 음악도 서양 전통을 따르는 것에 그 어떤 이질감도 없었지만, 의외의 선율이 들려왔다. 주인공 다프네의 사교계 데뷔날, 서로 돌아가며 여러 파트너와 춤추는 무도회의 음악은 분명 아리아나 그란데의 ‘thank u, next’였다. 화려한 가발을 쓴 현악사중주단은 태연하게 이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절묘한 편곡이었다.

모차르트나 바흐 등 널리 알려진 서양음악도 원곡 그대로 쓰이기는 했다. 옛 서양음악이 넓게 포진해 있었지만, <브리저튼> OST에서 또렷이 각인된 것은 현악사중주라는 외양 아래 숨어있는 팝 음악이었다. 아리아나 그란데만이 아니었다. 마룬 파이브의 ‘girls like you’, 빌리 아일리시의 ‘bad guy’, 션 멘데스의 ‘in my blood’ 등 꽤 많은 곡이 현악사중주로 편곡되어 있었다. 전자음으로 무겁게 울려야 할 것 같은 저음부나 목소리로 노래해야 더 빛날 것 같은 선율도 물론 있었지만, 꾸준히 팝을 현악사중주로 연주해온 비타민 스트링 콰르텟의 연주는 드라마에 산뜻한 기운을 더해준 일등공신이었다. 드럼이 타격하던 리듬은 활을 긁어내는 듯한 소리로 대체됐고, 건조하게 불리던 노래는 절대로 공들인 느낌을 주지 않은 채 무심히 연주됐다. 현악사중주라는 작은 편성에서도 그 원곡의 매력 포인트는 생생히 살아있었다.

시즌 1 마지막 화에서는 작곡가 막스 리히터의 ‘비발디 사계 재작곡’도 들려왔다. 이 곡은 우리가 숱하게 들어왔던 비발디의 사계를 편곡한 것도, 재해석한 것도 아닌 ‘재작곡’한 음악이다. 비발디 사계라는 고전 중의 고전을 다시 써내려간 이 대담한 곡은 원곡의 밀도를 줄여 무게를 가볍게 덜고, 그 사이 공간을 세련된 음악적 상상력과 화성으로 채워넣었다.

서양악기로 연주되는 크로스오버 음악 중 몇몇은 원곡을 단순히 화성·선율·리듬의 조합체로만 치환해 뭔가 열화됐다는 걸 느끼게 하곤 한다. 듣는 이를 상심케하는 이런 편곡은 원곡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가수 특유의 음색이나 곡 전체의 호흡을 관장하는 비트 등 무엇이 그 음악을 빛나게 하는 요인인지 곰곰이 고민하지 않은 채 익숙하게 들어왔던 대로만 편곡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리저튼> OST는 달랐다. 리히터의 음악은 원곡을 깊이 이해하고 만든 것임이 분명했다. 오랜 시간 팝의 문법을 고민해온 만큼, 비타민 스트링 콰르텟의 편곡도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팝과 현악사중주, 현대적으로 재작곡된 바로크의 음악 등 <브리저튼>의 소리세계는 과거와 동시대의 감각을 두루 포용한다. 서로 다른 것의 만남을 낙관할 필요는 없지만, 서로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한 만남은 ‘확장된 세계’를 경험케 한다. 역사와 픽션, 서로 다른 장르가 교차하는 <브리저튼>을 보고 들으며, 이 확장된 세계에서 피어오를 또 다른 이야기와 소리들을 기대해본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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