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도처에 '상왕'
[경향신문]
살아서 왕좌를 내주고 물러난 임금을 ‘상왕(上王)’이라 부른다. 한국에선 옥저를 정복한 고구려 6대 태조와 통일신라 진성여왕이 첫 남녀 기록자이다. 이 말이 대중화된 것은 KBS 사극 <용의 눈물>(1996~1998)에서다. 태조 이성계는 정종의 상왕이다가 태종의 태상왕이 됐고, 극의 주인공 태종은 세종의 상왕으로도 4년 더 머물렀다. “모든 악업은 내가 지고 갑니다. 저의 죄를 탓하시고….” 태종이 곡기를 끊은 채 비를 내려달라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마지막 대사는 지금도 곧잘 회자된다. 상왕이란 말에 실권을 넘긴 후견인부터 막후실력자·옥상옥·권력암투까지 여러 이미지가 중첩된 데는 피 묻은 조선 개국사를 159부작으로 풀어낸 이 사극의 영향도 컸다.
상왕 정치는 ‘3김’도 했다. “한창 보고하는데 총재가 창밖만 봐요. 더 얻어오란 거지.” 1990년대 새정치국민회의 원내총무였던 고 박상천 전 의원이 전한 DJ와의 일화이다. YS·JP도 가(假)합의된 협상안을 막판에 되돌린 게 한두 번이 아니고, YS와 DJ의 기싸움은 여당 총재를 겸직한 대통령 시절과 그 후까지 이어졌다. 오늘날의 상왕은 재벌이나 사학재단 이사장에게도 따라다닌다. 어느 여대 동문회 강연에선 “남자는 세상을 지배하고, 그 남자는 여자가 지배한다”는 말도 나왔다. 고구려·신라·고려·조선에서 15번 있었던 왕(대왕)대비의 수렴청정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정치의 세계에 ‘베갯바람’은 있다는 말이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상왕 논쟁이 불거졌다. 디테일의 싸움으로 불리는 후보 단일화 협상이 교착되면서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오세훈) 후보 뒤에 (김종인) 상왕이 있다’고 공격하자, 이준석 오세훈 캠프 뉴미디어본부장은 “본인을 조종하는 여자 상황제가 있단 말은 들었냐”고 받아쳤다. 안 후보가 “김종인 위원장 사모님과 아내의 이름이 같다. (그분을) 착각한 듯하다”고 응수하자, 김 위원장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 같다”고 쏘아붙였다. 상왕 시비는 상대 후보를 깎아내리면서 압박하려는 포석이다. 그 속에서 단일화는 모양 빠지게 개문발차하는 꼴이 됐다. 공언한 단일화 첫 시한(후보등록일)은 지나고, ‘아름다운 단일화’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이기수 논설위원 k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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