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서로의 시간을 묶어주는 것

인아영 문학평론가 2021. 3. 1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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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영화 <미나리>의 훌륭함을 이루는 줄기의 하나는, 1970년대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아메리칸드림의 좌절을 경험하는 결혼 10년차 제이콥과 모니카 부부 이야기다. 캘리포니아에서 10년 동안 병아리감별사로 일했던 그들은 아칸소의 미개간지를 구입해 한국 과일과 채소를 기르는 농장을 만들기 시작한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에덴농장의 성패를 가르는 관건은 농작물에 줄 물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제이콥과 모니카 부부가 어린 자녀 앤, 데이빗과 함께 낯선 미국 땅에서 꿈꾸고 있는 아메리칸드림의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대체 이 넓은 농장에 제대로 공급할 수 있는 물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토네이도가 몰아치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릴 이동식 트레일러에서 살아가는 한인 부부에게 꿈과 행복 역시 어디에?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이콥이 그토록 갈망하던 에덴농장의 번창은 실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 식료품점과 계약을 맺고 미래의 빛이 겨우 보이는 순간, 일이 순조롭게 풀리려는 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조금 더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아메리칸드림은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해 폐허를 남기고 흩어져 버린다. 그런데 성공에 가장 근접해지는 순간, 꿈이 폐허가 되기 전에 먼저 무너져 내리는 것은 농장이 아니라 제이콥과 모니카의 관계를 지탱해주던 믿음이다.

모니카는 “다 잃는 한이 있어도 여기서 내가 시작한 걸 끝내야겠다”고 말하는 제이콥이 에덴농장을 붙들고 있는 집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멋지고 강한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도 이해하지 못한다. 한편 제이콥은 자신에게 “다 잃는 한이 있어도” 괜찮은 것들, 그러니까 잃어도 되는 것들에 아내와 자녀들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모니카의 클로즈업된 얼굴과 그 안에 꾹꾹 눌러 담은 눈물은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이콥에게 자신과 자녀들은 상황이 좋은 때라야 함께할 수 있는 조건적 결과이지, 아메리칸드림의 실현과는 별개로 무조건적인 상황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낯선 미국 땅에서 서로를 구해줄 수 있는 것, 불행과 고난 속에서도 사람을 함께 살게 만드는 것,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의 시간을 묶어 미래로 당겨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메리칸드림의 성공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처참한 바닥이 되기도 한다. 아칸소의 아름다운 자연에서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에 비해 그리 대단하게 눈부시지 않을지도 모르는 성공에는 언제나 그런 바닥이 숨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한국에서 날아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가득 미나리를 키워내는 할머니는 예기치 못한 사고를 통해 그것을 미리 경험하게 해준 것이 아닐까. 불안정하게 삐걱거리던 가족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거실에서 함께 붙어 밤을 보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의 넋 나간 눈동자는 그들을 묶어주고 있는 것 같다. 조금은 신비주의적인 해결사 같지만, 때로는 그 무심하고 깊은 눈동자에 기댈 때에야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 사랑이 <미나리>에 있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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