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사는 게 뭐길래] 온통 맵고 짠 세상.. '순한 맛'은 어디에서 찾을까

장강명 소설가 2021. 3. 1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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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찐자' 벗어나려 식이조절 석 달 만에 라면.. 너무 맵고 짜 '깜짝'
살기 힘들어 그렇다는데, 작은 소리 순한 맛은 점점 설 자리 잃어가
드라마 막장, 막말 정치도 매운맛 경쟁.. '순한 맛', 돌아오긴 할까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외출을 거의 안 하게 되면서, 살이 확 쪘다. 체중계 숫자의 앞자리가 바뀌는 것을 목격하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이어트에 매달렸다. 달리고 운동하고 기름기 많은 음식 삼가기를 석 달여, 몸무게는 겨우 원래 수치로 돌아왔다.

식이 조절은 더 하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판단한 즈음에 좋아하던 라면을 오랜만에 끓여 먹었다. 충격이었다. 우아, 엄청나게 맵고 짜구나! 외식을 하러 나가서도 같은 이유로 몇 번 놀랐다. 그러자 그때까지 큰 불만 없이 먹던 다이어트식이 갑자기 종이 뭉치처럼 맛없게 느껴졌다.

/일러스트=이철원

평소 내가 먹던 음식들이 얼마나 자극적이었는지 깨닫는 계기였다. 내가 먹는 라면은 특별히 매운맛을 강조한 제품이 아니다. 2021년 한국인 입맛 기준으로는 지극히 평범한 빨간 국물 라면이다. 나를 비롯해 2021년 한국인들의 입맛이 그토록 강렬한 자극에 길들여져 있다는 뜻이겠다.

신라면이 매운맛을 마케팅 포인트로 내세우며 시장에 나온 게 1986년인데, 35년이 지난 지금 이걸 매운 라면이라고 부르기는 좀 민망하다. 신라면의 매운맛은 시기별로 조금씩 달라졌다는데, 최근 기사에는 고추과 식물의 매운맛을 표시하는 척도인 스코빌 지수로 2700 스코빌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2010년대에 나온 라면 중에는 스코빌 지수가 5000이 넘는 제품들이 수두룩하다. 라면뿐 아니라 과자, 치킨, 족발, 소시지, 돈가스도 매운 제품들이 나왔다. 마라탕과 마라샹궈가 유행하더니 얼마 전에는 급기야 매운 도넛, 매운 우유까지 나왔다. 좀 더 기다리면 매운 탄산음료나 매운 술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런 매운맛 열풍에 대해 흔히들 세상이 살기 힘들어진 탓이라는 분석을 한다. 점점 더 심해지는 스트레스를 매운맛으로 풀려 한다는 식이다. 글쎄, 그 말도 제법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내 생각에는 이런 종류의 경쟁은 한번 시작되면 그 자체의 힘으로 굴러가게 되는 듯하다. 세상의 평화와 상관없이, 보다 강한 자극을 향해.

악기는 음을 높여서 조율하면 대체로 소리가 밝고 화려해진다. 그래서 표준 조율음을 정하기 전까지 서양 음악계에서는 ‘음높이 인플레이션’이라는 현상이 일어났다. 연주자들이 조금씩 악기의 음을 높이는 경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작곡 당시의 악기 조율 방식과 연주법으로 연주하면 지금 우리에게는 반음 정도 낮게 들린다.

매운맛과 높은 음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보상을 받지만 순한 맛과 낮은 음은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다. 담백한 이야기, 작은 소리도 순한 맛과 처지가 비슷하다. 그래서 상업 영화의 폭력 묘사는 점점 더 잔혹해지고, TV 드라마의 막장성은 갈수록 심해지고, 팝송과 가요는 평균 음량이 커지면서 비트가 강렬해진다.

그렇게 다양성이 증가한다면 환영할 일이겠으나 실제로는 표준에 대한 감각이 바뀌면서 매운맛이 순한 맛을 쫓아내는 현상이 벌어진다. 라면 업계에서도 그랬다. 순한 국물 맛을 강조하며 ‘맵지 않아도 좋아한다고 말해주세요’라는 광고 노래를 만들었던 빙그레는 이제 더 이상 라면을 만들지 않는다.

특히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분야에서 이런 현상이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 정치 역시 대중을 상대하는 분야다. 막말을 일삼고 갈등을 부추기는 모리배는 카메라 앞에 자주 서게 되지만 타협하는 신사는 이름을 알리지 못한다. 2010년대 이후 용꿈을 꾸는 한국 정치인들은 대부분 이런 구조를 이해하고 ‘매운맛’ 경쟁을 벌였다. 언론도 거기에 퍽 협조적이었다.

이런 경쟁이 어느 선을 넘으면 사람들이 매운맛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순한 맛이 각광을 받는 때가 올까? 그런 식으로 매운맛과 순한 맛에 대한 선호가 순환하게 될까? 잘 모르겠다. 애초에 우리의 눈, 코, 귀, 입이 불공정하다. 게다가 캅사이신으로 매운맛을 내고 막말을 던지는 게 재료의 풍미를 살리고 정책을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더 매운 맛’은 늘 유혹적일 것이다. 만드는 이에게나, 먹는 이에게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표준 조율음을 만들고 영상물 상영 등급을 정하듯, 라면 맵기와 정치 문화에 대한 성문 규정을 마련해야 할까? 우리가 각자 감각기관의 편향된 신호를 극복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할까? 아니면 순한 맛에 보조금이라도 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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