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得보다 失 많은 靑 국민청원

김성현 문화부 차장 2021. 3. 17.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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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 보호 원칙 무시한 채 청원으로 곧바로 달려가
‘신문고’ 라는 취지 좋지만 여론몰이 도구로 악용 우려

얼마 전 피아니스트 백건우(75)가 프랑스에서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인 아내 배우 윤정희(77)를 ‘방치’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곤욕을 치렀다. 음악가라고 해도 유명인이기에 잘잘못이 도마 위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윤정희의 성년 후견인 자격을 놓고 백씨와 윤씨의 친정 동생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 논란에서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던 사실이 있었다. 처음 논란이 제기된 온라인 공간이 청와대 국민청원이라는 점이다.

청와대 홈페이지의 국민청원 코너에는 "청와대의 직접 소통은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철학을 지향합니다.국정 현안 관련, 국민들 다수의 목소리가 모여 30일 동안 20만 이상 추천 청원에 대해서는 정부 및 청와대 책임자(각 부처 및 기관의 장, 대통령 수석·비서관, 보좌관 등)가 답하겠습니다"라고 국민청원의 개설 의의와 운영 방식을 알리고 있다../청와대 홈페이지

물론 국민청원 게시판에서 윤정희라는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명예훼손의 성립 요건 가운데 ‘피해자 특정성(特定性)’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실명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전체 맥락으로 누구인지 유추할 수 있다면 명예훼손에 해당할 수 있다는 의미다.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알츠하이머로 투병하고 있는 노배우’라고 지칭하는 순간, 윤정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단지 이름 석 자를 가렸다고 책임을 면하는 건 아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관리 책임자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무신경’이요, 몰랐다면 ‘무개념’이다.

최근 ‘학교 폭력’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청원에는 순기능도 있다.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간절한 호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게시판이 여론 재판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부작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초 피해자 구제를 목적으로 했던 청원이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할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이다.

특히 온라인 시대에는 사건이 처음 보도되고 확산하고 판단을 내리는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특징이 있다. 법원에 가기도 전에 뭇매를 때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 사건에 대해 세 번까지 심판을 받는 것이 삼심(三審) 제도의 원칙인데, 이러다가는 법정에 서기도 전에 판결과 형량까지 정해질 판이다. 청원을 제기한 사람과 대상자 가운데 누가 진정한 피해자인지 가려낼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점도 온라인 청원의 맹점이다.

백씨 측과 윤씨 친정 동생들의 공방 역시 좁게 보면 가정사(家庭事)요, 넓게 보아도 민사상(民事上) 문제다. 프랑스 법정에서도 민사 소송이었고, 한국에서도 가정법원이 담당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가정사와 민사 문제마저 중간 과정이나 절차를 생략하고 곧바로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달려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사생활 보호나 무죄 추정 원칙은 무시되고, 참여라는 명분하에 직접 민주주의만 칭송받는다. 언제부터 청와대 게시판이 집안 싸움의 중개소가 된 것일까.

조선시대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이 하소연할 수 있는 ‘신문고(申聞鼓)’의 정신을 반영하려는 취지는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청와대 및 여론에 종속되는 ‘신민(臣民)’으로 전락하고, 누가 집권하든 청와대가 ‘임금’이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직접 민주주의와 정신적 봉건주의가 공존하는 건 우리 시대의 기묘한 역설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물에 동의 의견을 표시하는 현행 방식에도 동의하기 힘들다. 설령 동의 의견이 수십만 건에 이른다고 해도, 냉정하게 말해서 인기 투표일 뿐 표본 오차와 신뢰 수준을 갖춘 과학적 여론 조사를 대체할 수는 없다. 소셜미디어의 ‘좋아요’가 국정의 우선순위를 좌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인기 투표와 여론 조사를 혼동하는 국민청원은 부지불식간에 여론 몰이의 도구로 악용될 우려가 크다. 득(得)보다는 실(失)이 많은 청와대 국민청원을 이참에 없앴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데 이 의견도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려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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