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자유주의의 위기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2021. 3. 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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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일요일에 있었던 독일 남서부에 있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회의 선거 결과가 발표되었다. 녹색당 32.6%, 기민당 24.1%, 사민당 11.0%, 자유민주당 10.5%, 그리고 극우 정당인 대안당 9.7%였다. 독일 자유주의의 종가(宗家)답게 이 지역에서 자유민주당은 선전했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의회 진출의 하한선인 5%를 겨우 턱걸이하는 상황이다. 한때는 사민당이나 기민당과 함께 중앙정부를 구성했던 당이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베를린장벽 붕괴 직전에 발표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전 세계적인 범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완전 승리를 선언했다. 그때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요즘, 특히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자유민주주의 또는 자유주의의 위기에 관한 저술이 눈에 띄게 많다. 저자의 성향도 자유주의로부터 보수주의에 이르기까지 꽤 다양하다.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과 극적인 퇴장, 브렉시트를 둘러싼 갈등, 세계 곳곳에서 위세를 보이는 극우 포퓰리즘과 함께 코로나19 재앙에 대한 대응책을 둘러싼 많은 쟁점은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서도 그 어느 때보다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특히 코로나19 위기가 장기화하면서 기본적인 자유권에 심한 제약을 받게 되자 곳곳에서 국가의 위기관리능력에 대한 회의와 함께 저항도 거세졌다.

자유주의의 위기와 관련된 최근 논쟁은 먼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자유민주주의 안에 들어있는 두 가지 개념, 즉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에 있는 미묘한 차이와 갈등에 눈을 돌린다. 자유주의만을 극단적으로 고집할 때 이는 결과적으로 소수 엘리트만이 군림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경쟁 과정에서 탈락한 대다수 사람을 포퓰리즘의 동력으로 내몬다는 점이 주로 지적된다. 자유주의가 공적인 것보다 사적인 것을, 시민정신보다 개인의 이익을 끊임없이 강조하기 때문에 자유가 결국 불평등의 씨앗을 뿌리고 이의 결과로 자유주의는 자신의 토대마저 허문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과 퇴장
브렉시트를 둘러싼 갈등
세계 곳곳서 위세를 보이는
극우 포퓰리즘과 함께
코로나 대응을 둘러싼 쟁점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어느 때보다 깊이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 이 문제의 해결 전망은 어떤가. 논점 대부분이 한때 있었다고 믿어지는 이상적인 자유주의의 복권에 주로 초점이 머물고 있다. 자유주의 이후의 자유를 규명해보려는 젊은 미국 정치학자 패트릭 드닌의 <자유주의는 왜 실패했는가>는 조금 예외적이다. 그는 종교, 문화 그리고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지역환경의 함양을 통해 자유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찾고 있다. 개인주의적이며 이기적인 미국인이 이상하게도 그들 자신보다 더 훌륭한 철학을 지닐 수 있다는 점을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지적한 적이 있다. 드닌도 이런 자유주의에서 어떤 대안을 찾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위기와 이에 맞물린 대안 추구는 단순히 정치적 이념의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사회의 구조 문제와 직결된다. 이와 관련해서 로널드 레이건과 더불어 신자유주의의 화신이었던 영국의 마거릿 대처는 1987년 한 여성잡지와 인터뷰하면서 나름대로 명쾌한 주장을 편 적이 있다. “사회는 없다. 오직 개별적인 남성과 여성, 그리고 가족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우선 돌보지 않는다면 어떤 정부도 존재할 수 없다.”

개인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하는 시장의 합리성에 대한 확신이 바로 그 해법이었다. 시장의 자율성을 해칠 수 있는 어떤 경제정책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자유주의가 동반하는 사회적인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신자유주의는 그 이후 개별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 지구화 시대의 철학이 되었다. 개인적인 이해와 보편적인 복리 사이에 어떤 예정된 조화가 있다는 믿음은 흡사 부두(voodoo) 주술(呪術)처럼 경험적으로 전혀 입증되지 않았다고 케인스는 <자유 방림의 끝>(1926)에서 경고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오스트리아 작가 카를 크라우스(1874~1936)도 자유주의는 설거지물을 생명수인 것처럼 권한다는 쓴소리를 남겼다. 이 경고와 비판의 목소리는 거의 한 세기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경청할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경제정책은 반드시 경제행위의 보편적인 질서 수립에 필수적인 테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자유주의는 국가개입주의, 심지어 사회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2009년 12월1일 유럽연합은 ‘리스본협약’을 통해 사회적 시장경제를 지향한다는 공동의 큰 목표를 세울 정도였다. 사회적 시장경제를 뒷받침하는 정치문화의 전통이 취약한 미국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자유주의의 위기가 있기 이전에도 자유주의라는 단어는 종종 욕설의 범주에 속하기도 했다. 특히 자유주의 또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현실정치 안에서 구현한다는 정당이 바로 그의 원인 제공자였다. 자유주의 이념을 당명 속에 크게 새겼지만 실제는 극우 정당인 ‘오스트리아 자유당’(FPO)도 있다. 그래서 자유라는 단어를 당명에 집어넣는 것 자체가 상표 도용이라는 비난도 있다.

운신의 폭은 비록 좁아졌지만 자유주의와 사민주의를 결합해 1988년 재창당한 영국의 ‘자유민주주의자들’(DL)이나 중도주의가 사민주의, 진보주의와 함께 큰 판을 벌여 2017년 마크롱의 집권을 이끈 ‘전진하는 공화국!’(La Repubrique en Marche!)처럼 자유주의도 계속 변신을 시도했다. 유럽연합 안에서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들이 결성한 ‘유럽을 위한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의 연합’(ALDE) 안에서 활동하는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아일랜드와 같은 작은 나라도 있고, 동구권에 속했던 에스토니아,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닌 정당도 나름대로 활동하고 있다.

하기야 당 이름만으로 보자면 우리 정당사에도 ‘자유당’ ‘민주당’ ‘자민련’ 등 자유나 민주라는 이름을 새긴 정당은 지속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자유주의의 정치이념을 뿌리내리게 한 정당이 과연 있었던가. 정당이 자유주의를 검증하는 여과의 장이 아니라 도리어 이의 성장을 저해한 장본인은 아니었던가.

몇년 전에 있었던 새 역사교과서의 집필기준을 둘러싼 논란 때 보수진영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고 민주주의라는 개념만을 사용하는 데 대하여 거센 항의를 한 적이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에 대한 반대개념으로서 남북 간의 체제경쟁에서 승리를 이끌 수 있는 필수불가결한 이념적 무기인데 진보세력에 의해 심히 폄하되거나 부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자들도 나름대로 지난했던 민주화의 한 동력으로서 어느 정도 역할을 했지만 오랜 기간 많은 희생과 고난의 길을 걸었던 진보주의자들의 그것에 비하면 미미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보수주의의 당의정(糖衣錠) 역할을 해왔던 자유주의일지라도 변혁운동을 추동했던 열정적이고 전투적인 진보주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저변 확대를 위해 자유주의의 역할도 수용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견해도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이미 퇴조기에 접어든 지 오래된 자유주의에 관하여 이의 토양이 여전히 척박한 한국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 나는 먼저 국가보안법을 떠올리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를 기조로 삼는 헌법이 그의 하위법인 국가보안법에 의하여 훼손되는 비정상적인 상태가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용인될 수 있겠느냐는 의문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자유의 제한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시끄러운 유럽과 달리 지금 한국은 온통 부동산 문제로 들끓고 있는 것 같다. 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투자나 투기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반론도 가능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공정치 못한 경제질서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한국의 자유주의가 과연 어떤 해법을 제시할 것인지도 궁금하다.

그래서 희미한 자유주의에 거는 막연한 기대보다는 나는 오히려 스스로가 온전한 새로운 사회체계를 실천적으로 구성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싸우는 새로운 힘의 부상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지게 된다. 이 힘은 개인이 그저 외부적인 제약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의 소극적인 자유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 수립을 위해 연대하는 속에서 추동하는 적극적인 자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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