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 / 권김현영

한겨레 2021. 3. 1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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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미디어스타트업 ‘닷페이스’가 진행 중인 ‘온라인 퀴어 퍼레이드’ 일부 화면 갈무리.

권김현영 | 여성학 연구자

작년 여름, 연극을 보러 극장에 가는 길에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졌다. 극장 매표소까지의 거리는 10미터 남짓이었는데 세찬 빗줄기가 우산을 날려버렸다. “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위기입니다”라는 문장이 실감 났다. 세상이 어찌 되려나 걱정하며 극장 안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본 연극이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였다. 연극 전에 하던 걱정은 사라졌다. 인간은 어떻게든 길을 찾아내지 않을까. 오랜만에 인간에 대한 희망이 살아날 정도였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트랜스젠더의 재현과 장애인 접근권이라는 두 가지 오래된 고민에 대한 해답을 준 작품이다. 대중문화에서 트랜스젠더는 희화화와 일반화라는 문제를 겪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디스클로저>에는 트랜스젠더 배우와 감독, 각본가 등이 나와 트랜스젠더를 조롱하거나 혐오하지 않으면서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도 중요한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영화에서 흔히 트랜스젠더는 속임수나 반전의 장치로 사용되곤 한다. 이렇게 도구화되는 것도 문제고 현실과 재현 사이에서 소위 ‘사기’의 내러티브가 이어지게 되는 것도 문제다. 트랜스젠더 여성의 역할을 시스젠더 남성 배우가 맡아서 했을 때 사람들은 그 연기에 남겨진 ‘진짜’ 성별의 흔적을 찾게 되고 연기를 통해 사람들을 잘 속여냈다는 데 감탄한다. 이렇게 되면 트랜스젠더의 성별은 그 자체로 ‘속이는 행위’로 취급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다면 트랜스젠더 여성을 시스젠더 여성이 연기하면 어떨까? 이주영 배우는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서 트랜스젠더로 나오는 마현이를 어떻게 연기할까 고민하다가 성별보다는 인물 자체를 연기하려고 했다고 답했다.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답변이었다. 트랜스젠더 재현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역할이 아니라 성별 그 자체를 연기하려고 하는 것. 범주 그 자체를 재현하는 것은 해당 범주에 대한 가장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문화적 편견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일 이상이 되기 어렵다.

비단 트랜스젠더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비장애인이 기본으로 설정되지 않은 채 진행되는 연극을 보았다. 주인공의 성별과 체형, 목소리는 계속 변했고, 수어통역과 음성해설은 보조장치가 아니라 극의 개성과 조화를 모두 담당했다. 한번도 이런 방식이 가능할 거라고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 배우도 특정 나이나 성별을 연기하지 않았다. 40대 배우가 10대 연기를 하는데 10대처럼 보이려고 전혀 애쓰지 않고 그 역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연기했는데, “10대 때는 다 저랬지” 이런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수어통역과 음성해설은 극에 완전히 녹아 있어서 내가 해당 감각에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이 연극이 어떻게 느껴질지가 궁금해졌다. 내가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정상성이 상대화되는 감각, 경계가 다시 재구성되고 이를 통해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나와서 가장 먼저 극작가의 이름을 확인했다. 이은용. 조금 흥분해서 단톡방에 “이은용 작가가 누구야? 천잰데?”라고 올렸더니, 먼저 알고 있었던 이가 자랑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기색으로 “잘 쓰지”라는 답이 왔다.

얼마 전 이은용 작가의 부고를 들었다. 이번 칼럼에서 나는 최근 연달아 유명을 달리한 트랜스젠더 시민, 극작가 이은용, 음악교사이자 활동가이고 정치인이었던 김기홍, 군인 변희수를 애도하는 글을 쓰려고 했다.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계속 혐오와 싸워나가자는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며칠 밤을 보냈다. 연이어 들린 트랜스젠더의 부고 앞에서 누구에게라도 책임을 묻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성소수자를 치워버리라고 말한 안철수에 대해 분노의 말을 쏟아내고 싶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의석수를 가지고도 차별금지법을 발의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의 외면을 성토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분노와 성토를 할 마음의 힘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 쓰기로 했다. 이 상실이 우리 모두의 상실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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