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모호한 '마음'
[경향신문]
복잡미묘한 인간 마음을, 명료한 대의명분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 <스파이의 아내>는 줄거리만 설핏 보면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거시적인 영화 같지만, 실은 인간의 마음에 미시적으로 집중하는 영화다.
영화의 중심에는 태평양전쟁 직전인 1940년 한 부부가 있다. 무역상 유사쿠(다카하시 잇세이)와 그의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는 일본 고베 지역에 산다. 메이드와 집사가 있는 집에 사는 부르주아이자, 서구식 복장을 하고 짧은 필름영화를 즐겨 찍는 인텔리다. 어느 날 조카인 후미오(반도 료타)와 사업차 만주에 갔던 유사쿠가 일본 731부대의 만행을 필름에 담게 된다. 유사쿠는 일본의 만행을 적국인 미국을 통해 세상에 알리고자 하고, 처음엔 만류하던 사토코도 우여곡절을 거쳐 남편과 뜻을 함께하게 된다.
유사쿠와 사토코의 행동은 목숨을 건 정의로운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하는 말이나, 보여주는 행동은 ‘정의’라는 단어로 말끔하게 설명되지 않고 시종일관 모호하다. 영화 중반부에 유사쿠와 사토코가 논쟁하는 장면에서 유사쿠는 “난 코스모폴리탄이야” “(내가 따르는 건) 만국 공통의 정의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아내와의 신의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아니고, 중요한 순간에 친밀한 사람을 배신할 것만 같은 분위기를 지속적으로 풍긴다. 국제사회에 고발하겠다며 들뜬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서구 망명을 위해 필름을 이용하려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이건 사토코도 마찬가지다. 사토코는 필름 반출 행위에 가담하기로 하면서 “당신이 스파이라면 스파이의 아내가 되겠어요”라고 말한다. 비장해야 할 순간에 사토코는 묘하게 들떠 있거나,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한다.
영화 전반에 깔린 이 모호한 분위기는 감독의 의도로 보인다. 구로사와 감독은 지난 9일 언론 시사회 후 열린 화상 기자간담회에서 “지금까지 현대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면서도 ‘인간의 자유와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리려고 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아무래도 현대사회를 무대로 하면 무엇이 진정한 자유인지, 행복인지 묘사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확실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영화를 끝낸 경우가 많았다. 전쟁 중이었다고 생각하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집중하는 것은 시대적 배경이 어떠하든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되는 인간의 ‘마음’이다. 그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최우선에 둔 인간의 선택이란 무엇인가’에 답을 주지 않고, 애매모호한 영역에 질문을 던져뒀다.
구로사와 감독은 이 작품으로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2020년 6월 NHK에서 방영된 스페셜 드라마를 화면 비율과 색상 등을 조절해 극장용에 맞게 재구성했다. 오는 25일 개봉한다.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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