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어머니들이 빚던 옛 방식 그대로.. 명주가 살아났다 [나의 삶 나의 길]

최현태 2021. 3. 1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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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전통주 복원 나선 김희숙 명인
꾸벅꾸벅 밤새도록 고아서 내렸던
어머니의 향기 가득 담긴 '모향주'
번잡함 없는 마음으로 내려야 제맛
매일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성 담아
1995년부터 시어머니에 전수 받아
레시피 없어 수많은 시행착오 반복
전통 잇는 책임감에 포기 않고 매달려
좋은 술의 비법은 누룩을 잘 빚는 것
공장 대량 생산 술·고소리술 차이
전기밥솥 밥과 가마솥밥 차이 비슷
최근 젊은이들 전통주 관심 많아져
사라진 오합주·강주 등도 복원 소망
전통방식으로 고소리술을 복원한 대한민국 식품명인 김희숙 제주술익는집 대표가 12일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중산간동로 제주술익는집에서 고소리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 대표는 사라진 제주의 다른 전통주 복원에도 나설 계획이다.
작은 술잔을 들어 코끝에 갖다 대자 비강을 어루만지는 그윽하고 우아한 배꽃향. 어린 시절 어머니 품에 안겨 잠들 때마다 온 몸을 감싸주던 그리운 추억의 내음이다. 알코올도수는 40도로 높지만 목넘김은 실크처럼 부드럽다. 그리고 따라오는 은은한 단맛과 길게 이어지는 여운. 왜 명주로 불리는지 금세 알겠다. 2020년 국제슬로푸드협회 ‘맛의방주’에 올라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제주 고소리술. 15년에 걸친 노력 끝에 사라져 가던 우리나라 3대 소주의 하나인 고소리술을 전통방식 그대로 복원하는 데 성공한 이는 대한민국 식품명인 84호 김희숙(62) 제주술익는집 대표다.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중산간동로의 운치 있는 양조장에서 그의 손맛을 따라 술 익는 봄날의 향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머니 향기 닮은 제주 고소리술

실제 고소리술은 ‘모향주(母香酒)’로 불린다. 어머니의 향기가 가득 담긴 술이라는 뜻이다. “오래전 제주에서는 집집마다 저녁에 고소리로 술을 내렸어요. 꾸벅꾸벅 졸면서 밤새도록 불을 때 고아서 내렸죠. 그러다 보면 술향이 몸에 배요. 한 방에서 온 가족이 자던 시절이라 새벽에 방으로 돌아온 어머니 몸에서는 늘 술향이 났어요. 그러면 어렴풋이 잠결에 ‘어머니가 이제 술 다 내렸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고소리술은 어머니에게서 나는 향기로운 술이란 뜻을 담아 모향주로 불렸답니다.” 명인은 그런 어머니를 떠올리며 지금도 매일 오전 3시에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고소리술을 내린단다.

고소리술은 제주 어머니들이 빚던 옛 방식 그대로 아무런 첨가물 없이 오로지 좁쌀, 보리쌀과 누룩으로 제주 전통 증류기인 고소리에서 정성껏 한방울 한방울 고아 내린다. 화산토양인 제주에서는 벼가 자랄 수 없어 좁쌀이 주식이었고 당연히 술빚는 재료도 좁쌀, 보리쌀 같은 잡곡이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대를 이어 내려오는 비법으로 빚은 굉장히 맛있고 몸에 좋은 가양주들이 많았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변형, 왜곡됐고 해방 후에는 먹는 것조차 부족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들다 보니 술을 빚어서 먹을 여유가 없었어요. 더구나 술약이라고 해서 효모를 봉지에 담아 팔았기에 전통 누룩을 빚을 필요도 없어졌고 그러다 보니 토속주가 다 사라져 버렸죠. 전통주는 단지 알코올이 아니라 그 고장의 풍토, 민속, 문화적인 배경이 모두 담긴 술입니다. 그 지역 삶의 증거물이죠. 요즘은 현대식 대형 증류기를 사용하고 일본 누룩인 입국이라든가 현대적인 발효제를 넣어 술을 빚는 것도 전통주라고 부르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전통주라고 보기 어려워 좀 아쉽네요.”

#눈물겨운 고소리술 복원 과정

명인은 술을 빚을 운명이었나 보다. 그의 어머니는 조미료 없이 조선간장 하나로도 모든 음식을 맛있게 만들었는데 술도 잘 빚었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자란 명인은 지금도 그 맛을 기억한단다. 결혼 후에는 고소리술 기능보유자로 제주도 무형문화재(11호)인 시어머니 김을정 여사를 만나게 된다.

“시할머니가 주막을 한 덕분에 시어머니가 집안에서 내려오는 비법으로 술을 빚었어요.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사람 사귀는 것보다 술 빚으면서 조용하게 사는 것을 더 좋아해요. 고소리술은 어머니 같고 친구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지인들은 제가 빚은 술이 아주 맛있다고 하네요.”

발효주인 막걸리나 약주는 곡식이 생겨났을 때부터 마셨을 정도로 역사가 아주 오래됐다. 하지만 고소리 증류기법 들어온 것은 고려시대인 12세기 말∼ 13세기 초로 몽고에서 전파됐다. 고소리술은 한땀 한땀 바느질을 하듯 정신력을 집중해 고소리로 내려야 하는데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만큼 술빚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번잡함이 없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술을 내려야 제대로 맛을 낸단다. 명인이 오전 3시에 일어나는 이유다.

이런 고소리술은 복원과정도 시련의 연속이었다. 1995년부터 시어머니에게서 고소리술을 전수받기 시작해 2010년 전수교육 조교로 선정됐지만 정확한 레시피는 없었고 따라서 일정한 품질의 술을 만들어내기는 매우 어려웠다.

“토요일 제주시내에서 한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곳에 와서 술을 빚고 파김치가 돼 일요일 막차 버스를 탈 때는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는 회의가 많이 들었죠. 주변에서도 ‘왜 너는 돈도 안 되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을 그렇게 하느냐’는 핀잔이 쏟아졌어요. 더구나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지만 고소리술을 팔아 돈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이에 보리농사를 짓고 직장도 다니면서 고소리술에 매달렸답니다. 공무원, 유치원 교사도 하고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해 영양사, 위생사,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등 생계에 도움이 될 만한 자격증도 닥치는대로 취득했죠. 생계를 꾸려가며 고소리술을 복원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펑펑 울던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에요.”

명인은 고소리술을 전수받으면서 어깨가 무거워졌다. 알면 알수록 보인다고 전수를 포기한다면 순수한 전통과 역사, 선조의 삶과 추억조차도 다 묻혀 버린다는 사실에 큰 책임감을 느꼈고 포기하지 않고 매달린 끝에 고소리술 복원에 성공했다.

전통 누룩 복원과정이 가장 힘들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통 누룩은 대부분 사라졌고 빚는 방법을 아는 어르신들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더구나 껍데기가 두꺼운 좁쌀은 전분이 많지 않아 발효가 잘 안 돼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어렵게 어르신들을 몇분 찾아내 고증을 통해 전통 누룩의 공통점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했어요. 여러 문헌도 보고 왜 계획대로 술이 안 빚어지는 끊임없이 연구했죠. 증류 때 어느 시점에서 그만 받아야 할지, 어떻게 하면 더 향기롭고 맛있게 되는지 등 레시피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것은 지루한 나와의 싸움이었답니다. 증류과정에서 위험도 많이 따랐습니다. 증류할 때 알코올 도수가 70도를 넘어서기에 불이 붙지 않도록 모든 과정을 곁에서 꼼꼼하게 살펴야 해요. 실제 시어머니는 고소리술을 증류하다 집에 화재가 난 적이 있을 정도예요. 정확하게 물과 불을 조절할 때까지 많은 숙련이 필요합니다.”
#어렵게 인정받은 명인의 손맛

일본 입국으로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드는 술은 알코올은 확 올라오는데 첨가물이 없으면 맛이 없어서 아스파탐 등을 첨가한다. 하지만 고소리술은 좁쌀, 보리쌀과 전통 누룩으로만 빚고 첨가물을 전혀 넣지 않는다. 그래도 맛이 구수하고 숙성되면 꽃향기가 저절로 나오며 알코올 도수는 40도이지만 굉장히 부드러워 목넘김이 좋다. 마신 뒤 머리나 목이 아픈 숙취는 당연히 없다. 어떤 비법이 있을까. 밀로 만드는 누룩을 잘 빚는 것이 가장 중요하단다.

“아주 힘찬 누룩을 만들어야 합니다. 밀을 거칠게 빻아 물을 잘 치대 수분이 골고루 스며들어야 해요. 누룩틀에 놓고 잘 밟아야 하는데 단단하게 디디지 않으면 안에 공기층 생겨 잡균이 들어가죠. 야생 효모가 많이 든 콩깍지와 볏짚을 칸칸이 놓아서 한 달간 잘 띄웁니다. 다행히 제주도는 따뜻하고 야생효모가 공기 중에 많아 누룩이 잘 만들어지는 편입니다.”

좁쌀과 보리쌀로 만든 고두밥에 이 누룩을 잘 치대 항아리에 묻은 뒤 한 달이 지나면 맑은 양조주가 만들어진다. 이를 가마솥에 넣고 그 위에 고소리를 얹은 뒤 틈을 밀가루 시룻번으로 모두 막는다. 밑에서 불을 때면 가마솥에 담긴 양조주의 순수한 알코올 성분이 수증기가 돼 위로 올라가고 찬물을 넣어두는 장탱이와 만나면 결로현상으로 고소리벽에 대롱대롱 술이 맺히면서 고소리 코로 방울방울 떨어진다. 이를 2년 이상 항아리에서 숙성해야 비로소 명인의 고소리술이 완성된다. 명인은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든 술과 고소리술의 차이를 전기밥솥에서 만든 밥과 가마솥밥의 차이처럼 더 구수하고 맛있다고 설명한다.

#다양한 제주 전통주 복원을 꿈꾸다

제주오매기맑은술도 2019년 한·칠레 청와대 공식 만찬 식탁에 오른 명인의 대표 작품이다. 좁쌀과 햇쌀, 누룩으로 빚는 알코올 도수 16도의 약주인데 장기 발효숙성으로 맛이 진하고 부드러우면서 달콤한 천연 과실향이 나며 산도가 좋아 우리 음식과 찰떡궁합이다. 이제 명인은 고소리술뿐 아니라 제주의 다양한 전통주 복원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대표적인 술이 오합주와 강술이다.

“고소리술을 30년 동안 연구하다 보니 제주에 묻힌 좋은 술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제주의 풍부한 식물 덕분입니다. 식물의 보고인 한라산의 나무, 열매, 꽃이 다 술의 재료로 쓰였더군요. 옛날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빚던 오합주가 대표적이랍니다. 유정란, 꿀, 참기름, 청주 등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재료가 들어가요. 예전에 몸이 마르고 허약한 어르신을 위해 겨울에 빚어 보약처럼 먹던 전통주랍니다. 꿀이 들어가 재발효되면서 하나의 맛과 향으로 재탄생하는 거죠. 저녁에 한 잔씩 먹으면 몸의 보양을 돕는다고 합니다. 강술은 이화주처럼 제주 좁쌀로 만드는데 알코올 도수가 높고 향이 농축된 술입니다. 목동이 말을 몰고 나갈 때 제주도 특산물인 이파리가 넓은 양하잎을 삶아 무쳐 먹으며 강술을 물에 섞어 마셨다고 전해집니다. 옛 방식 그대로 빚어서 후세에 전해지던 이런 제주 전통주들이 모두 사라졌는데 하나하나 복원하고 싶네요.”

고소리술의 명맥을 잇는 것은 쉽지 않지만 다행히 전수자들이 있어 역사와 문화를 이어가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막내아들인 강한샘(33)씨가 4대째 고소리술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도 오전 4∼5시에 일어나 술을 빚는다.

“고소리술은 개인 소유가 아니라 제주의 고유한 문화유산으로 후대에 잘 전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다행히 요즘에는 흥청망청 마시는 술문화에서 벗어나 몸에 좋은 술을 찾아 마시는 트렌드가 생겼어요. 특히 젊은이들이 전통주에 관심이 많아져서 고소리술을 배우러 오는 분들이 많이 늘고 있답니다. 덕분에 우리 몸에 좋고 특색 있는 제주의 술들이 앞으로 많이 복원될 것 같네요. 일본에는 사케, 아일랜드에는 위스키, 프랑스에는 와인이 있듯 한국을 대표하는 우리 술, 전통주를 많이 아끼고 사랑해 주세요.”

서귀포=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wgye.com

김희숙 제주고소리술익는집 대표는 ●1959년 제주 출생 ●2010년 제주도 무형문화재 11호 고소리술 전수교육조교 ●2018년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84호(고소리술) ●2020년 국제슬로푸드협회 맛의방주 등재(고소리술) ●2019년 제14회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 제주도지사 만찬주 선정(오메기맑은술) ●2019년 한국·칠레 정상회담 청와대 만찬주 선정 (오메기맑은술) ●2018년 찾아가는 양조장 선정(농림축산식품부) ●농촌융복합산업(6차산업) 인증 승인 ●술품질 인증 취득 ●JQ인증마크 취득 ●2017·2021년대한민국주류대상 수상(오메기맑은술) ●2019년도 제주특별자치도 농업인상 수상(가공유통부문) ●2020년도 제주도지사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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