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공연계에 다양성의 씨… 대중문화 성장 일군 '학전' 30년 [S 스토리]

박성준 2021. 3. 13. 18: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배우·음악인 키워낸 ‘꿈의 텃밭’
소극장 실험정신, 판을 바꾸다
매체 밖 가수들의 무대
‘아침이슬’ 만든 김민기, 대학로에 설립
김광석·동물원·들국화·안치환 등 공연
홍대 인디음악 공연장 활성화 단초 돼
한국 뮤지컬 새 장 열어
국내 첫 라이브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獨 원작 압도… 소극장 넘어 세계서 호평
‘의형제’ 등 다양한 음악극 실험 이어가
배우사관학교로 명성
흥행 실패 때 노개런티 업계 ‘악습’ 탈피
최소 수입 보장… 배우 존중 신뢰 쌓아
황정민·설경구·김윤석·조승우 등 거쳐가
‘학전’이 창설 30주년을 맞는다. 가객 김광석과 들국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노래를 불렀고,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 등 숱한 배우들이 연기를 가다듬은 곳이다. 우리나라 뮤지컬 역사에 한 장을 쓴 ‘지하철 1호선’, ‘개똥이’ 등이 만들어졌고 ‘유홍준 교수의 한국 미술사 강좌’가 열렸다. 학전소극장으로 1991년 3월 15일 문 연 후 학전블루, 학전그린, 극단 학전 등으로 가지를 뻗으며 획일적 상품문화와 자본논리에 굴하지 않고 대중문화 실험정신과 다양성을 지켜낸 공간이다.

◆미래를 위한 못자리

“학전(學田)이 한자로 ‘배울 학’에 ‘밭 전’자다. 학전 처음 열 때 내가 한 말이 있다. 여기는 조그만 곳이기 때문에 논바닥 농사가 아니다, 못자리 농사다. 못자리 농사는 애들을 촘촘하게 키우지만, 추수는 큰 바닥으로 가서 거두게 될 거라고.”(김민기(사진), 2015년 한겨레 인터뷰 중)

척박한 환경에서 학전을 30년 동안 일군 건 김민기 학전 대표이고 그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음악 평론가 강헌은 김민기를 두고 “모든 혁명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고 한 번도 영어의 몸이 되지 않았지만 가장 오랫동안 저항의 깃발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1970년대 노래 ‘아침이슬’과 음악극 ‘공장의 불빛’ 등을 만들며 검열과 탄압의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던 김 대표는 한동안 농사를 짓다 1980년대 중반부터 다시 어린이를 위한 노래극을 만들며 공연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던 중 서울 대학로 한 지인 건물 지하 공간을 후배들에게 극장으로 주선해 주려다 계약이 불발되자 미안한 마음에 그가 직접 문 연 무대가 학전 소극장이다.

김민기 학전 대표
故 김광석은 학전에서 라이브 공연 1000회의 전설을 만들었다.
개관 공연은 김덕수 사물놀이네의 ‘소리굿’을 시작으로 여행스케치 ‘추억여행’,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등 콘서트는 물론 현대무용과 전통예술 등이 어우러졌다. 현재와 미래를 향해 성장하는 전통예술의 맥, 뿌리를 찾아 새로운 가치를 펼치려는 대중예술의 좋은 싹을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창설 초기에는 주로 아이돌 그룹, 댄스뮤직 열풍에 무대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했던 가수들 터전이 돼줬다. 여행스케치를 시작으로 가객 김광석이 라이브 공연 1000회의 전설을 만들었다. 동물원도 1993년 ‘우리가 세상에 길들기 시작한 후부터’를 시작으로 많은 라이브 공연을 학전 소극장에서 열었다. 16년 만에 재결성한 들국화 첫 무대 역시 학전이었다. 윤도현, 강산에, 시인과촌장, 김목경, 박학기, 장필순, 한영애, 한동준, 하덕규, 안치환 등 90년대 대중음악을 거론할 때 빠질 수 없는 아티스트들이 빠짐없이 무대에 섰다.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는 KBS 프로그램이 됐고 그 계보는 ‘이소라의 프러포즈’ ‘윤도현의 러브레터’ ‘유희열의 스케치북’으로 이어진다. 대학로 일대에는 학전 성공에 자극받은 라이브 콘서트 전문 공연장이 생겨났고 이는 다시 홍대 쪽으로 퍼지며 인디음악 산실이 된다. 장필순은 “학전에서 치러지는 콘서트들은 다른 공연장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공연들이었다. 음악을 하시는 선배님이 대표이시다 보니 음악 공연에 대한 남다른 이해와 애정을 갖고 계셨고, 물심양면으로 힘을 실어주셨다”고 회고했다.
◆창작뮤지컬의 전설, ‘지하철 1호선’
라이브 콘서트 전당이었던 학전 소극장은 1994년 ‘극단 학전’ 창단을 계기로 한국형 음악극을 실험하는 공간으로 거듭난다. 독일 그립스 극단 원작 ‘리니에 1’을 김 대표가 우리나라 현실에 맞게 전면 개정한 ‘지하철 1호선’이 그 시작이다. 중국에서 서울로 온 연변처녀 선녀가 주인공이다. 백두산에서 풋사랑을 나눈 한국남자 제비를 찾으려 입국했다. 그녀가 하루 동안 지하철 1호선과 그 주변에서 부딪치고 만나게 되는 실직가장, 가출소녀, 자해공갈범, 잡상인 등을 통해 당시 서민 삶을 보여주며 객석을 위로했다.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3000회 특별공연에 출연해 지하철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양아치역할을 맡아 열연하는 황정민과 뒤에 앉아 이를 지켜보는 조승우.
이 작품은 형식 면에서도 가변형 소극장 무대에 11명의 배우를 세우고 5명의 밴드가 연주하는 우리나라 첫 라이브 밴드 록뮤지컬로서 새로운 면모를 선보였다. 초연부터 호평받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관객들이 알아보고 열광하는 학전 대표 레퍼토리가 된다. 현실을 반영하며 개정에 개정을 거듭한 결과 독일 원작자는 “‘지하철 1호선’은 독립된 창작물”이라며 1000회부터 저작권료도 면제했다. 원작 고향인 독일은 물론 일본, 중국, 홍콩 등에서도 공연됐으며 소극장을 벗어나 LG아트센터 무대에서도 진가를 보여줬다. 2008년 4000회를 끝으로 김 대표는 “배우·스태프가 너무 소진된다”며 공연을 중단했다. 10년 만인 2018년 재개했는데 그 오디션에는 ‘배우 사관학교 된 작품’이란 명성답게 무려 917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학전은 지하철 1호선 이후에도 ‘의형제’ ‘모스키토’ 등 다양한 음악극 실험을 이어갔다. 특히 1996년 인근에 소극장 학전그린을 새로 열면서 ‘학전블루, 학전그린’ 이원 체제로 운영된다. 2013년 건물 매각으로 사라졌지만 학전그린은 소극장 학전에서 5년간 라이브 콘서트와 지하철 1호선을 공연하며 쌓은 경험이 담긴 극장이었다. 당시 소극장에선 보기 드문 수준의 조명과 음향을 갖췄으며 음악극에 최적화된 무대였다. 이원 체제로 학전은 다양한 레퍼토리를 축적했다.
학전블루 공연장 입구.
학전은 극단 운영에서도 흥행에 실패할 경우 배우에게 개런티를 지급하지 않는 것이 관행처럼 돼 있던 연극계에서 배우에게 최대한의 출연료를 보장하는 독특한 개런티 시스템을 도입했다. 반드시 서면계약으로 최소 개런티를 보장하고 흥행이 좋으면 이득을 나눠가졌다. ‘학전을 운영하는 대표로서 최종적으로 바라는 바는 ‘학전’에 관련된 모든 식구가 ‘학전’ 일을 통해 먹고살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 공연문화는 사람이 하는 몫이 가장 큰 것이기에 사람 간 존중과 신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김 대표 지론이었다.
배우를 존중하는 풍토에 장기공연 관행과 김민기 대표의 독특한 연기지도가 겹치면서 학전은 '배우 사관학교'가 됐다. ‘학전 독수리 오형제’로 불리는 설경구, 김윤석, 장현성, 황정민, 조승우가 학전 출신으로 유명하다. 2001년 지하철 1호선 공연에는 지금 스타가 된 설경구, 김윤석, 장현성, 조승우, 황정민, 그리고 최무열이 한꺼번에 출연했을 정도. 이밖에도 방은진은 지하철 1호선 초연으로, 배해선은 98년 ‘의형제’로 학전무대에 대뷔했다. 이정은은 96년 ‘지하철 1호선’ 곰보할매 역으로 학전에 데뷔했다. 안내상, 배성우, 김희원, 박명훈과 신성록, 정문성, 김대명 등이 2000년대 ‘지하철 1호선’과 ‘모스키토’ 등에 출연한 학전 출신 배우다.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는 “‘지하철 1호선’은 강남 부동산 복부인이 등장했을 정도로 한국화를 완벽하게 해낸 작품이고 ‘의형제’ 역시 마찬가지”라며 “돈벌이가 되어야 만들어지는 게 상업뮤지컬이고 이를 위해 유명배우를 무대에 세우곤 하는 풍토에서 학전은 30년 동안 열악한 상황에서도 꾸준히 예술 창작 정신을 승화시켜왔다. 공연계에 굉장히 많은 씨를 뿌려 공연계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학전이 여러 창작자와 협업해 2010년 초연한 어린이뮤지컬 ‘도도’. 학전 제공
◆적자에도 아동·청소년극 고집… “아이들 문화적 영감 필요”

학전의 오늘과 미래는 어린이·청소년극에 집중하고 있다. 2004년 ‘우리는 친구다’를 시작으로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무적의 삼총사’, ‘진구는 게임 중’ 등 학전 어린이 무대 시리즈를 꾸준히 선보였다. 청소년을 위해선 ‘모스키토’와 ‘복서와 소년’ 등 학전 청소년 무대 시리즈를 따로 만들고 있다. 만들어 공연할 때마다 적자를 보면서도 김민기 학전 대표의 어린이·청소년극에 대한 열정은 집요함에 가깝다. 젊은 시절 탄광 마을에 살았던 경험, 마을 아이들의 일기를 바탕으로 이미 1987년 어린이 뮤지컬 ‘아빠 얼굴 예쁘네요’의 대본·작곡을 맡았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어린이극에 남다른 가치를 두고 있다. 언론 인터뷰에서 김 대표는 어린이극에 집착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학교와 학원의 입시 위주 교육 외에 문화적 소스라고는 TV와 게임 미디어밖에 없습니다. 그것만 갖고 아이들의 정서적, 정신적 생활을 건강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보고, 듣고, 말하고, 만지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종합적 이성이 완성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 아이들은 너무 협소하게 자라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아이들을 위해 지금 우리의 작업은 최소한의 것입니다. 제가 힘들다고 그것마저 포기할 순 없겠지요.”

‘우리는 친구다’부터 ‘무적의 삼총사’, ‘진구는 게임 중’에 이르기까지 어린이극 역시 학전 대표작인 ‘지하철 1호선’과 마찬가지로 독일 그립스 극단 폴커 루드비히 원작을 김 대표가 번안·연출한 게 특징이다. 특히 학전 아동극은 부모의 이혼 문제, 학교 폭력, 장애아에 대한 차별 문제, 게임 중독 등 현실을 가감 없이 설득력 있게 그린다.

2010년 어린이무대 레퍼토리에 추가된 ‘도도’는 학전의 새로운 시도다. 독일 원작 대신 작가 강정연의 장편동화 ‘건방진 도도군’을 원작으로 작가 배삼식과 김민기의 대본·가사에 고찬용 작곡, 홍세정 안무로 젊은 작업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제작됐다.

박병성 공연 칼럼니스트는 “학전은 소극장 콘서트뿐만 아니라 번안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며 뮤지컬, 어린이극에서 독보적인 역할을 해온 곳”이라면서 “특히 학전 어린이극의 특징은 어린이 관점에서 어린이들이 실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