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친구가 물었다 "文대통령, 와 이랍니까"

곽창렬 기자 2021. 3. 13.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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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곽창렬 기자의 열창] 여권 원로 김정길 前 행자부 장관, 문재인 정부 향해 고언(苦言)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이 지난달 서울 마포에 있는 한 카페에 청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늘 청바지 차림으로 다녀요. 편하고, 좋잖습니까.” 그는 “이젠 정치인도 아닌데 정장 입고 다닐 필요가 없다”며 “정치가 참 적성에 안 맞았다”고 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문 실장, 당신이 해요, 당신이 나가면 이깁니다.”(김정길 전 장관)

“장관님, 저는 이빨도 안 좋고, 녹내장도 있어서 정치하기 어렵습니다.”(문재인 변호사)

2010년 초, 민주당 소속 김정길(76) 전 행자부장관이 부산에 있는 P호텔 2층 일식당에서 문재인 변호사를 만났다. 문 변호사의 멘토로 알려진 송기인 신부도 함께였다. 노무현 대통령 사망 1주기 추모 열기 속에 치러지는 그해 6월 지방선거를 두어 달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야권(현 여권)에서는 노무현의 고향인 부산시장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투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김정길은 문재인 출마를 설득하기 위해 총대를 멨다. 그는 1990년 노무현과 함께 3당 합당을 거부하고 같은 길을 갔다. 그래서 ‘노무현의 영원한 친구’라 불린다. 그러나 문재인은 끝내 출마를 고사했고, 김정길은 선거에 나가 떨어진다. 하지만 ‘승리와 다름없는 패배’란 말이 나왔다. 민주당 공천을 받고도 45%(62만여 표)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의 노력 덕분일까. 그로부터 8년 뒤 민주당은 사상 처음으로 부산시장 선거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민주당 소속 오거돈 시장은 성추행 혐의로 4년 임기를 3년도 채우지 못하고 중도 사퇴했다. 오 전 시장의 가족은 신공항 예정지인 가덕도 주변에 땅 투기를 했다는 비난까지 받고 있다.

2013년 정계를 은퇴한 뒤 7년여 만에 침묵을 깬 김정길 전 장관은, 문 대통령이 민주당 대표이던 시절 ‘선출직 공직자가 부정부패 등 중대한 잘못으로 직위를 잃으면 재·보궐선거에 공천하지 않는다’고 정한 당헌을 바꿔 이번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후보를 낸 것에 대해 “옳지 않다”고 했다. 문 대통령의 국정 운영은 “눈앞에 있는 것만 보고, 내 편만 챙긴다”고 비판했다. 검찰 개혁을 둘러싼 갈등 끝에 윤석열 검찰총장이 사퇴한 것에 대해서는 “결국 그를 정치판으로 불러낸 건 문 대통령”이라고 했다.

◇성추문 민주당의 보궐선거 공천 “옳지 않다”

-오거돈 시장의 성추행으로 부산에서 보궐선거가 치러진다.

“마음이 아프다. 사실 오 전 시장은 내가 정계 은퇴 안 했으면 시장 선거에 나올 생각 안 했을 거다. 내가 정계 은퇴를 선언하니 출마 여부를 상의하는 전화가 왔더라. 그래서 내가 ‘하시라’고, ‘부산에 당신만 한 사람이 있느냐’ 그랬다. 직접 도와준 건 아니지만, 그분이 자기 콘트롤이 안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민주당이 당내 규정을 바꿔 후보 공천을 했다.

“문 대통령이 당 대표로 있을 때 만든 당헌이니 지켰어야 한다. 민주당에서 미는 후보가 있으면 탈당해 무소속 후보로 나오게 하면 된다. 더군다나 성추문 사건으로 국민 세금이 낭비되는 선거이지 않나. 집권당이 당헌 바꾸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건 옳지 않다.”

–2010년 선거에서 아쉽게 패했다. 부산시장직에 대한 미련은 없었나.

“사실 나는 당시 문재인 실장이 시장 선거에 나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문재인 인기가 계속 오르던 시기라 나보다 당선 확률이 높았다. 송기인 신부님과 함께 만났는데도 거절하기에 ‘납득할 이유를 대달라’ 하니 ‘제가 청와대 민정수석 할 때 신경을 써서, 이빨이 13개가 빠졌습니다. 그리고 녹내장이 있어 조금만 신경을 쓰면 눈이 튀어나올 듯 아픕니다’ 하더라. 건강이 안 좋다는 사람한테 어떻게 선거에 나가라고 하겠나.”

김정길 전 장관이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한 2010년 5월, 주말을 맞아 부산 영도에 있는 태종대공원에서 문재인 당시 명예선거대책위원장과 공동 유세를 하는 모습. / 김정길 전 장관 제공

–그런데 문재인은 2년 후 총선에 출마하며 정치인이 됐다.

“그때는 문재인 자신이 정치하고 싶은 게 아니고, 주변의 노사모들이 등을 떠밀었다. 이호철이니 최인호니 하는 측근들이 믿을 만한 후보가 없으니 문재인을 못살게 들볶아서 마지못해 업혀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력이 지금 문 대통령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보나.

“대통령이 됐으면 자기 소신을 갖고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데, 그게 지금 안 되고 있다. 정말로 역사에 남을 훌륭한 대통령이 될 거라고 믿었는데 안타깝다. 만나는 사람마다 문 대통령을 비판하니 듣고 있기가 괴롭다. 고향 후배이고, 노무현 대통령이 아끼던 분이라 더 안타깝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시나.

“눈앞에 있는 것만 보고 정책을 편다. 원전 정책이 그렇지 않나. 우리가 원전 없이도 전력 수급에 문제가 없는지, 전기요금 인상에 영향을 미치는지 다 감안해서 정책을 결정해야 하는데 대통령이 되자마자 원전을 중단시켰다. 그 바람에 국민 세금 1조원 가량이 날아갔고 다시 재개시켰다. 너무 성급했다. 부동산 정책도 퇴로를 열어줘야한다. 보유세는 올리면, 양도세는 낮춰서 아파트 두세 채 가진 사람이 팔도록 해야 매물이 나온다. 두 채 가진 사람 가운데 지방 출신은 시골에서 부모님이 사시는 집을 상속 받아 한 채가 있고, 서울에서 생활하니까 서울에 아파트가 하나 있는 경우도 있다. 그게 그렇게 큰 죄인가. 아파트 한 채라도 부당한 방법을 썼다면 세금을 많이 걷어야 하지만, 두 채가 있어도 정당하다면 인정을 해줘야 한다. 정책이 계속 실패하는데도 왜 안바꾸는지 모르겠다.”

◇윤석열 대권 후보로 키운 건 문재인

–문 대통령이 왜 잘할 거라고 기대했나.

“일단 부정부패하지 않을 것으로 봤다. 남 비판할 줄 모르고, 성품도 온화하고, 약자 편에 있었으니까. 더구나 자기가 모셨던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도 고초 겪는 걸 봤으니 제대로 할 거라 믿었다.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취임사에도 감동했다. 그렇게만 해주면 나라 꼴이 되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지 4년이 다 돼가도록 취임사가 하나도 지켜지지 않더라. 국민 화합 실패하고, 국민을 네 편과 내 편으로 두 동강 냈다. 적폐 청산도 저렇게 요란하게 하는 게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정치를 잘못해서 탄핵으로 쫓겨났지만, 감옥에 3~4년 가둬두는 게 정의로운 것인지 의문이 든다. 국민 통합을 위해 용서하고, 청와대로 불러 고언도 듣고 그래야 한다.”

① 1990년 김영삼 총재가 이끌던 통일민주당이 당헌을 고쳐 3당 합당을 최종 추인하자, 서울 마포 당사 밖에서 눈물을 훔치는 장면. ② 1998년 행정자치부 장관 시절,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업무 보고를 하는 모습. ③ 2006년 대한올림픽위원장 시절,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국가올림픽위원회 총연합회(ANOC) 총회 개회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맞이하는 모습. / 조선일보DB·김정길 전 장관 제공

–문 정권의 위기는 조국 전 법무장관 사태로 시작됐다. 대통령은 조국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해서 논란이 됐다.

“나도 조 전 장관이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당한 허물이 드러났고 그것이 문 대통령에게 큰 부담이 됐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는 걸 보면서, 역시 정치를 오래 안 해서 훈련이 덜 됐다는 생각을 했다. 조국이 대통령을 위한다면 소셜미디어 정치도 그만해야 한다. 이미지 다 망가지고 국민들이 돌아섰는데, 무슨 글을 쓰나.”

–윤석열 전 총장이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나는 윤 전 총장이 (대통령·집권당과) 불화를 계기로 정치에 나서는 건 바람직한 처신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윤 총장을 대권 후보로, 지지율 1위로 키운 건 문 대통령이다. 윤 총장 임명할 때 문 대통령은 ‘산 권력도 철저하게 수사하라’고 했다. 그래 놓고, 청와대로 칼 끝이 향하니까 쫓아내려고 하는 건 옳은 처신이 아니다. 추미애와 윤석열이 1년 넘도록 갈등을 빚을 때 문 대통령은 방관했다. 둘 다 청와대로 불러서 꾸짖든지, 둘 다 사표를 받든지 해야 했다. 임명만이 아니라, 갈등을 조정하는 게 대통령 할 일 아닌가.”

–대선 판세가 요동치고 있다.

“윤석열에겐 두 가지 길이 있다. 본인이 직접 나서거나, 킹 메이커가 되는 경우. 지금 야권에는 뚜렷한 후보가 없다. 내 생각에 윤 전 총장이 최재형 감사원장이나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등 제3의 인물을 밀어 대통령을 만들겠다고 나서면 100% 이길 거라고 본다. 그러면 윤 전 총장의 정치적 입지가 더 넓어지고, 다음 대권도 넘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직접 하겠다고 나서면 여권의 상당한 저항을 받게 된다. 그 과정에 이런저런 일이 불거질 테고, 현재의 좋은 이미지가 반감될 수도 있어 당선 확률은 50대 50으로 떨어질 것이다.”

◇유승민 전 의원에게 마음의 빚 있다

김정길은 김영삼(YS) 대통령 밑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재선(12대·13대) 국회의원이던 시절, 1990년 3당 합당이 그의 운명을 바꿨다. 노무현과 함께 3당 합당을 거부하고 김대중(DJ) 대통령 진영으로 넘어갔다. 후에 김대중 정부에서 행정자치부 장관과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냈지만, 3당 합당을 거부한 ‘죄’로 이후 부산에서 일곱 번 출마해 모두 떨어졌다.

–YS 진영에서 DJ 진영으로 갔다.

“내가 우리나라 정치인 가운데 유일하게 김영삼 대통령 초등학교(경남 거제 장목초등학교) 후배다. YS가 20대에 국회의원 선거 나왔을 때, 우리 학교에서 합동연설회를 했다. 잘생긴 데다 연설도 잘해서 참 멋있더라. 그때부터 정치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이후 국회의원이 됐고 3당 합당 반대하며 김대중 진영으로 갔는데, 나중에 김원기 국회의장 등에게서 들으니 김대중 대통령이 내가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밑에 있을 때부터 유심히 지켜봤다고 하더라.”

–김대중 대통령과는 원만하셨나?

“1999년 2월, 김대중 정부의 청와대 정무수석이 된 첫날 두 분이 화해해야 한다는 리포트를 써서 올렸다. DJ에게 ‘제가 모실 테니 밤중에 상도동을 살짝 찾아가서, 손잡아주고 오자’고, 상도동이 우리를 문전박대 못할 거라고. 그런데 보고를 올린 다음 날 아침 대통령 표정이 달라지더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셨다. 그래도 내 생각은 변함이 없어서, 정무수석으로 특강 같은 걸 할 때 두 대통령이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내용이 신문에 실리는 날이면 대통령 낯빛이 안 좋아졌지만 정무수석 그만둘 때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얘기했다. 대통령이 듣기 좋은 말만 하면 그게 무슨 참모인가. 지금은 직언하는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떨어지는데도 계속 부산에서 출마했다.

“지역주의 타파라는 대의명분 때문에 부산에서 계속 나갔다. 노무현도 서울 종로로 가서 출마했지만, 민주당에서는 부산에 나 말고 지킬 사람이 없었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될 거라고 생각했나.

“내가 노 대통령보다 한 살 많은데, 1980년대 국회의원 되기 전에는 서로 알지 못했다. 그러다 3당 합당 때 우리 둘만 거부했고, 선거에 떨어지면 포장마차에서 신세 한탄하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2000년 총선에서도 둘 다 떨어지고 야인이 됐는데, 어느 날 마포에서 점심을 먹자고 하더라. 대뜸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갈 테니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사람들이 국회의원도 못된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찍겠나’ 생각했지. 그런데 결국 되더라고. 그 양반이 ‘대통령 못 해먹겠다’처럼 해서는 안 되는 말도 과감하게 하지 않나. 그런 솔직함, 결단력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

–보수 진영 정치인 가운데 빚진 사람이 있다던데.

“내가 1970년대 초 부산대 총학생회장을 할 때 반정부 시위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적이 있다. 구속적부심을 담당한 판사가 유승민 전 의원 선친인 유수호였다. 수의를 입고도 나는 내가 옳다고 주장했는데, 유 판사는 학생으로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수긍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나를 석방했다. 그로 인해 유 판사는 법복을 벗었다. 이후 나란히 국회의원이 됐는데, 당이 다르니까 찾아가기 어렵더라. 2015년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치할 때 한번 찾아뵐 걸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유승민에게도 마음의 빚이 있는 셈이다.”

◇문빠 두렵지 않다… 문 대통령이 안타까울 뿐

김정길은 2012년 19대 총선에 문재인, 영화배우 문성근과 함께 부산 서부 지역에 출마했다. 셋의 이름을 따 ‘문성길’ 트리오라는 별칭이 생겼다. 문재인은 사상에서 당선됐지만, 김정길과 문성근은 떨어졌다. 2013년 정계를 은퇴하고 부산에서 1년여간 우동집을 차렸다가 접었다. 현재는 서울에서 살면서 부산에 있는 숙박업소 운영을 위해 가끔 부산에 내려간다. 코로나로 매출이 80% 이상 줄었다고 했다.

–왜 우동집을 열었나.

“2012년 총선이 끝나니 2014년 부산시장 선거에 또 야권 후보로 거명되더라. 이대로 가면 또 끌려나가겠다 싶어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우동이 서민들이 좋아하는 음식이고, 나도 우동을 좋아해서 우동집을 차렸다. 일본에서 요리사를 데려와 아내와 함께 운영했다. 장사는 꽤 잘됐는데 정말 힘들더라. 밤 10시에 가게 문 닫고 직원들 퇴근하면 그때부터 나와 아내가 설거지했다. 특히 아내는 우동집이 청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화장실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새벽 2시 넘어 퇴근했고, 몇 시간 못 자고 아침 일찍 나와 다시 가게 문 열 준비를 하다 보니 아내가 대상포진에 걸렸다. 그때 자영업자분들 정말 열심히 사는구나, 사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 절감했다.”

–선거에서 계속 떨어져 가족들이 힘들었겠다.

“고통을 줬지. 애들(2남 3녀)이 내 앞에선 이러고 저러고 내색은 안 했지만, 정치 그만했으면 하는 생각 많았을 거다. 특히 부산 사람이 호남 출신 김대중 대통령을 따라갔으니 선거 때면 흑색선전에 시달렸다. 내 아내가 호남 출신이다 보니 ‘마누라 때문에 김정길 다 망친다’는 소리도 나왔다. 2010년 부산시장 선거 출마를 고려했을 때 아내가 반대해서 집에서 한 달간 쫓겨나기도 했었다.”

–다시 정치를 한다면….

“아~ 정치 안 한다. 정치의 ‘정’자도 싫다.”

–왜 그리 끔찍해 하시나.

“지나고 보니 나는 정치와는 맞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역주의 타파라는 대의명분에 사로잡혀서 정치했는데, 정치를 하려면 권모술수도 필요했다. 3당 합당할 때 따라갔으면 편하게 국회의원 했을 거고, 노무현도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서 국회의원 됐는데, 나는 부산에서만 선거 나갔다. 그래도 소신대로 정치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요즘 정치판 보면 ‘빨리 잘 그만뒀다’는 생각도 든다. 정치가 여유도 없고 각박해졌다. 내가 정치판 있을 땐 만날 최루탄 마셔도 낭만이 있었다. 국민이 우리 편이란 마음이 있었다. 지금은 국민이 우리 편이 아니라 내편은 내편, 네 편은 네 편이라는 것만 있다. 금태섭 전 의원만 봐도 그렇지 않나. 민주당 내에서 그만한 소리도 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당이 발전한다. 공산당처럼 한목소리만 나와서야 하겠나. 나와 노무현이 당내 대표적인 비판 세력이었다.”

–문 대통령이나 민주당에서 찾은 적 없나.

“청와대 비서관이 한번 연락해서 주소를 묻더라. 명절에 선물 보낸다고. 그게 다였다. 섭섭한 거 없다. 오히려 홀가분하다. 지금 이런 정치 풍토에서 내가 이런저런 말 한다고, 그 사람들이 내 얘기를 받아들이겠나. 헛소리하는 거지, 허허!”

–오늘 문 대통령에게 쓴소리 많이 하셨다. ‘문빠’가 두렵지 않나.

“나는 남은 인생 정리하는 사람이다. 문빠? 겁나지 않는다. 기사 나가면 ‘문재인 도와주고 지지했던 자가, 대통령 인기 떨어졌다고 욕한다’는 사람 있을 거다. 대통령도 이 기사 보면 서운해 하시겠지만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정말 안타까운 마음에 마무리라도 잘해주셨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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