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대 닦던 손으로 1억원 거머쥔 '26세 당구퀸'

강동웅 기자 2021. 3. 1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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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 딸 같아서 그러지."

2013년 서울 강남의 한 당구장.

당구를 치던 한 중년 남성이 음료를 서빙하던 10대 여성 아르바이트생의 등을 쓰다듬으며 건넨 말이다.

아르바이트 시작 한두 시간 전부터 당구장에 나와 동호회 사람들과 공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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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BA 왕중왕전 초대 챔프 김세연
18세 때 알바 계기로 큐 잡아.. 밤새도록 칠 정도로 흠뻑 빠져
2017년 대학 중퇴, 선수의 길 "죽는 순간까지도 당구와 함께"
김세연은 8년 전 시급 5500원을 받으며 당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2017년 선수로 나서 올해 여자프로당구(LPBA) 월드챔피언십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 LPBA 제공
“아휴! 딸 같아서 그러지.”

2013년 서울 강남의 한 당구장. 당구를 치던 한 중년 남성이 음료를 서빙하던 10대 여성 아르바이트생의 등을 쓰다듬으며 건넨 말이다. 매일 5시간씩 시급 5500원을 받으며 닉네임 ‘뽀로로’라 불리던 이 여성은 8년 뒤 당구 퀸이 된다. 최근 끝난 여자프로당구(LPBA) 월드챔피언십에서 초대 챔피언에 오르며 우승 상금 1억 원까지 거머쥔 김세연(26·TAS·사진)이다. 그는 “여성 당구인이 많지 않던 시절 당구를 배우면서 몸을 함부로 만지며 성추행을 하거나 반말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열심히 해서 유명해져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키 158cm의 가녀린 체구에 양쪽 귀가 모두 보일 정도로 짧게 친 쇼트커트가 인상적인 김세연은 동안이라 가끔 중학생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사각의 당구대를 호령하는 당구 퀸이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 당구대 닦는 ‘걸레’ 대신 ‘큐’를 들다

8년 전 18세 김세연은 말 그대로 ‘당알못’(당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편의점, 피자집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는 “당구장 아르바이트가 편하다”라는 친구 소개로 당구와 인연을 맺었다. 매일 오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30번 넘게 테이블을 닦고, 음료를 서빙하고, 계산을 도왔다.

약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공을 쳐볼 기회가 생겼다. 그 모습이 기특했던지 당구장 사장이 100만 원 상당의 개인 큐를 빌려주기도 했다. 아르바이트 시작 한두 시간 전부터 당구장에 나와 동호회 사람들과 공을 쳤다. 밤새 치다가 이튿날 아침 해가 뜨는 모습을 볼 정도로 당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당구의 길은 무궁무진하다. 칠 때마다 항상 다른 위치에 있는 공을 칠 수 있어 늘 새롭다. 내가 의도한 대로 공이 맞아 들어갈 때면 온몸이 짜릿하다.” 2017년 다니던 대학을 중퇴한 뒤 선수 등록을 했다.

○ 슬럼프 이겨낸 원동력은 ‘사랑’

2019∼2020시즌 PBA-LPBA 출범 직후 처음 열린 파나소닉 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 연거푸 예선 탈락했다. 1년 가까이 본선 진출에 실패하자 실망감에 당구를 포기할까도 싶었다.

그래도 주위의 애정 어린 조언에 다시 큐를 잡았다. 김병호 프로는 수강료도 없이 지도를 해줬다. 김 프로는 LPBA 동료인 김보미의 부친이라 자신도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다. 김 프로는 그에게 “지금 급한 건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라며 “이미 지나간 실수를 더 이상 후회하지 말라”고 지적했다. 진심이 담긴 이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후벼 팠다.

2020∼2021시즌 첫 대회인 SK렌터카 챔피언십에서 그는 예선을 통과해 16강 본선 문턱을 넘어서 자신감을 되찾았다. 두 달 뒤 TS샴푸 챔피언십에서는 개인 통산 첫 LPBA 우승을 차지했다.

○ “내 인생, 당구와 평생을”

그는 좋은 성적을 내는 것뿐 아니라 당구에 대한 열정으로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선수가 되는 것이 목표다. “‘저 선수는 정말 당구를 사랑하는 구나’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그는 죽을 때까지 큐를 잡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당구를 향한 열정이 뜨겁다. 경쟁자이기도 한 동료 선수들까지 성원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의욕이 넘쳤다. 월드챔피언십 결승전 직전 동료 김민아가 보낸 ‘준비됐지? 믿는다’라는 짤막한 문자는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서 잊히지 않고 있다. “동료들이 부러워하기만 하고 나를 응원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진심으로 내가 우승하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니 너무 고마웠다. 난 정말 축복받은 사람인 것 같다.”

강동웅 기자 lep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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