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룽윈은 평생 민주를 옹호, 독재에 굽히지 않았다"

2021. 3. 1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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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 체구 작았지만 검술·봉술 탁월
사관학교에서 무술 실력으로 두각
윈난의 군정 쥐락펴락했는데
우파로 찍혀 사망 사흘 뒤에 부고
마오, 조문은커녕 조화도 안 보내
저우언라이, 펑쩐 통해 부인 위로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7〉
중일전쟁 기간 윈난은 중국의 후방기지였다. 중국 전구(戰區) 사령관 장제스 영접하기 위해 쿤밍 공항에 나타난 룽윈. [사진 김명호]
1962년 6월 29일, 신화통신이 한 노인의 죽음을 타전했다.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상무위원,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중앙상무위원 룽윈(龍雲·용운)이, 1962년 6월 27일 오전 7시 30분,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통일선전부 부부장이 룽윈의 부인 구잉치우(顧映秋·고영추)를 방문했다. 발표가 3일간 지체된 이유를 설명했다. “룽윈을 우파분자로 규정한 것은 착오였다. 이틀간 토론을 거쳐 이름 앞에 우파분자 4자를 삭제하자고 중앙에 건의했다. 각 당파도 이견이 없었다.”

각 당파, 사흘간 토론 끝에 장례 준비

군사정변으로 도독 탕지야오를 하야시킨 룽윈은 탕이 사망하자 유럽식 묘를 조성하고 정중히 안장했다. [사진 김명호]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도 구잉치우를 찾았다. 침통한 표정으로 룽윈의 공을 열거했다. “중국의 민주혁명에 공헌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1인 독재에 반대하고, 항일전쟁 승리에 기여한 공이 크다.” 얌체 근성은 여전했다. 변방 윈난(雲南)을 안거낙업지지(安居樂業之地)로 탈바꿈시킨 진짜 업적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장례위원회가 구성됐다. 원수(元帥) 천이(陳毅·진의)와 류보청(劉伯承·유백승)을 필두로 베이징 시 서기 펑쩐(彭眞·팽진) 등 31명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영결식은 북적거리지 않았다. 구잉치우의 만련(輓聯)이 눈길을 끌었다. “공은 보잘것없어도, 평생 민주를 옹호하고, 독재에 굽히지 않았다. 개인에겐 불충했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변한 적이 없다.”

마오쩌둥은 조화 등 상징성 조문조차 하지 않았다. 중국 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주덕)의 불참도 의외였다. 저우언라이는 달랐다. 마오와 주더를 따라 했지만, 밤늦게 펑쩐을 보내 구잉치우를 위로했다. 미국에 있던 쑹즈원(宋子文·송자문)은 소식을 접하자 통분했다. 대만의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추도회라도 열어라.” 반응이 없자 낙담했다. 못 마시는 술이라도 한잔 들어가면 매제 장제스를 원망했다. “쓸데없는 고집으로 철저히 망했다. 일본 패망 후 윈난에 있던 룽윈을 건드리지 않고,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을 둥베이(東北)에 보냈더라면, 공산당에게 중국을 내주지 않았다. 애통할 뿐이다.” 대륙 시절, 쑹은 룽윈과 장쉐량, 두 사람과 유난히 친했다. 오죽 울화가 치밀었으면 누이동생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도 한동안 절교하다시피 했다.

20세기 상반기, 윈난은 룽윈의 천하였다. 18년간 면적이 프랑스의 2배인 윈난의 군정 대권을 한 손에 쥐고 흔들었다. 윈난인들도 룽윈을 윈난왕(雲南王)이라 부르며 정말 존경했다. 문화 수준이 딸렸던 룽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전후로 지혜롭고 현명한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룽윈의 부인 리페이롄(李培蓮). 33세 때 세상을 떠나면서 친구 구잉치우에게 룽윈을 부탁했다. [사진 김명호]
룽윈은 1884년, 윈난성 자오퉁(昭通) 교외의 소수민족 집에서 첫울음을 내질렀다. 벽촌이다 보니 교육기관이 있을 리 없었다. 글자를 익혀야 할 나이에 흙장난만 쳤다. 다섯 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미래의 윈난왕과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외삼촌은 성품이 넉넉했다. 조카를 아들 루한(盧漢·노한)이 다니는 학교에 입학시켰다. 루한은 1살 위인 외사촌을 친형처럼 따랐다.

시골 선생들은 실력이 없었다. 툭하면 두들겨 팼다. 두 소년은 학교라면 쳐다보기도 싫었다. 검술과 봉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쓰촨(四川) 무술 대가의 문하에 들어갔다. 무예를 익히며 저우눠헝(鄒若衡·추약형)과 죽이 맞았다. 셋은 당시 유행이던 의형제를 맺었다. 자칭 “자오퉁 3검객”이라며 의기양양했다. 전 쓰촨 군벌 양썬(楊森·양삼)의 회고를 소개한다. “룽윈은 체구가 왜소했다. 상대가 얕보기 쉬웠다. 동작은 번갯불 같았다. 상대의 공격을 피하다 허점이 보이면 한 방에 날려버렸다.”

1911년 봄, 3검객은 생활 전선에 나섰다. 목재 운반으로 돈 냄새가 익숙해질 무렵 사고가 났다. 화물 손실은 물론, 인부 20명이 압사했다. 세 사람은 각자 살길을 찾았다. 룽윈은 반청(反淸)부대에 합류했다. 그해 10월, 신해혁명이 발발했다. 혁명은 혼란의 끝이 아니었다. 천하대란의 시작이었다. 각 성에서 독립을 선언한 군벌들끼리 전쟁이 벌어졌다. 단 하루도 총성 그친 날이 없었다.

룽의 발차기 한 방에 거구의 장사 기절

행정원장 쑹즈원(오른쪽)은 룽윈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1937년 8월 난징(南京)에 온 룽윈과 환담하는 쑹즈원과 동생 즈안(子安). [사진 김명호]
룽윈은 루한과 함께 쿤밍(昆明)의 “윈난육군강무당”에 지원했다. 룽은 기병과, 루한은 보병과에 합격했다. 윈난 도독(都督) 탕지야오(唐繼堯·당계요)는 순수 한족(漢族)이었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정통파 군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강무당을 자주 방문해 생도들을 관찰했다. 시험 출제와 채점도 직접 했다. 학문과 담을 쌓은 룽윈과 루한은 항상 꼴찌였다.

무술 솜씨가 룽윈의 운명을 바꿨다. 가을 운동회에 프랑스인(일설엔 러시아인) 장사가 나타났다. 거인에 가까운 괴력의 소유자였다. 몸놀림도 민첩했다. 이틀간 링 위에서 생도들과 난타전을 벌였다. 연전연승한 프랑스인은 안하무인이었다. “천하에 나를 당할 사람은 없다. 누구든 나와라.”

룽윈은 병중이었다. 루한이 권하자 짚신 신고 링에 올랐다. 프랑스인은 룽의 발차기 한 방에 기절했다. 여파가 엄청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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