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꽃 피고 단단한 나무

김민식 기자 2021. 3. 1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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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식 내촌목공소 대표

이른 봄 꽃피고 열매 맺는 나무

유독 단단해 목재 품질 ‘으뜸’

덴마크산 가구 꾸준한 인기는

양질의 벚나무 재목 사용 덕분

여행지서 만난 꽃나무 떠올리며

나무쟁이의 속내 드러내 보인다

여수를 다녀왔다. 우수, 경칩이 지났으니 꽃은 연이어 필 것이다. 작은 섬 경도에 동백꽃이 한창이었지만 벚나무는 저만치서 본체만체하고 있었다. 꽃망울도 낌새 없는 벚나무 앞에서 내 꽃 욕심이 민망하다. 산중에 살면서 겨울 골바람에 시달렸나, 꽃소식 들리면 마음은 매번 절기(節氣)도 건너뛴다. 하여 일기와 상관없이 매화 보러 섬진강, 동백꽃 찾아 남도길로 앞장선 적이 많다. 목수라 대팻밥만 먹을 건가. 춘정 못 이겨 아예 사과나무·배나무·산매화를 집 주위로 촘촘히 심기도 했지만 내 뜰의 꽃은 늘 새초롬하다. 가꾸는 이의 정성만큼 꽃나무도 응답하나 보다. 이른 봄 교목(喬木·키 큰 나무)이 하룻밤 사이 불쑥 꽃을 꺼내 보일 때의 감격은 나의 온전한 서정인가?

‘애타게 당신을 사랑한다’(동백꽃), ‘순결 절세미인’(벚꽃) 애달픈 꽃말에다 ‘앞머리에 꽂은 꽃장식 빗 과수원의 그녀’, ‘선운사 육자배기 가락 주모’도 겹쳐 오지만, 내 시선은 활짝 핀 꽃을 지탱하는 나무 몸통을 놓치지 않는다. 깊은 병이다. 꽃피고 열매 맺는 나무는 대체로 질기고 단단하다. 동백이 그러하며 벚나무·배나무·복숭아나무도 마찬가지다. 이른 봄 꽃피고 과실의 즙과 향기 매혹적인 나무는 목재의 품질이 더할 나위 없다. 고금의 시인은 꽃을 노래했고 화가는 화폭에 담았지만, 이 꽃나무들의 목재를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나무를 만지는 나도 매일반이다.

이렇게 꽃 피우는 우리 주변의 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제주도, 진해, 여의도에 왕벚나무가 아무리 많아도, 심지어 일본 열도의 유명 공원에 벚꽃이 그렇게 흐드러져도,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벌채해 운반하고 갈무리하는 사람이 없다. 상업적 최소 수량을 채우지 못하는, 즉 경제성 때문이다. 유럽이든 아시아에서든 세계의 목상들은 벚나무 목재를 찾아 너나없이 미국 버지니아로 간다. 북반구에서 가장 비싼 목재가 벚나무다. 아무렴 벚나무는 어렵사리 구할 수나 있지만, 동백나무·사과나무·배나무 목재는 아예 찾지도 못한다. 그런데 10여 년 전 주황색 로고가 선명한 오랜 패션 하우스에서 배나무·사과나무로 만든 작은 가구를 봤다. 나무에 화들짝 놀라 원산지를 살피니 프랑스였다. 세상에도 론 강가의 그 농부, 노르망디의 가구 제작자는 배나무·사과나무를 베어 보관했다는 것 아닌가. 100년, 200년 꽃 피었던 과실나무다. 부끄럽구나, 우공이산(愚公移山). 프랑스에 우공(愚公)이 있었다.

이태 전 여름에는 배나무 두꺼운 판재 한 장을 발견했다. 런던 외곽의 허름한 제재소. 고가에 저의(底意) 놀랐으나, 옅은 분홍색 표면은 꿈꾸는 듯했고 치밀한 무?결은 잘 익은 치즈 덩어리같이 부드러웠다. 루마니아에서 구했노라며 주인이 자랑하는데 목리(수령)가 200년은 족히 넘었다. 그렇다, 동구와 시베리아에도 분명 좋은 목재가 있을 터. 긴 겨울 때문인지 러시아인들의 꽃나무 사랑도 각별하다.

톨스토이 백작이 슬라브를 대표하지는 않겠지만, 야스나야폴랴나 생가와 모스크바의 집은 벚나무·사과나무로 가득했다. 두 집 모두 박물관으로 바뀌었고 관광객이 줄을 잇는데, 내 눈에는 문호가 손수 가꿨다는 장원의 과수만 남아 있다. 꽃나무 이야기 무겁기로는, 안톤 체호프의 희곡 ‘벚꽃 동산’에 비길까? 희곡의 마지막은 ‘뒤이어 벚꽃 동산 먼 곳에서 나무에 도끼질하는 소리만 은은히 들려온다. 막이 내린다’. 이 불후의 장면은 어떤 무대 설치도 대사도 없이 그냥 설명으로 끝난다. 벚꽃 동산의 주인 라네프스카야 가족은 뿔뿔이 헤어지고 러시아 전통 귀족계급은 벚나무 베어지듯 몰락했다. 아마 벚나무 재목은 덴마크 가구 제조업자의 수중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덴마크산 가구가 이토록 세계인들의 성가를 받는 것은 주변국에서 공급되는 양질의 목재 덕분이다.

내촌목공소는 대부분 가구를 참나무·호두나무·물푸레나무로 만든다. 이런 거수(巨樹)들은 미국·프랑스·독일 등지에서 그나마 쉽게 구하는 수종이다. 그런데 근래 목공소를 찾아온 인문학자들이 벚나무를 주목한다. 벚나무를 누가 볼세라 아끼며 단지 소품으로 두엇 제작해 전시장 한 귀퉁이에 뒀을 뿐인데, 어떻게 벚나무 목재를 알았을까? 이들은 나무의 원산지까지 캐묻는다. “미국 버지니아에서 온 나무랍니다. 온 세계가 악기와 가구재로 미국의 활엽수를 주로 사용하지요. 독일도 일본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 설명이 구구하다.

봄마다 벚꽃은 그렇게 피고 복숭아꽃·살구꽃 가득한 나라에서 미국산 활엽수로 가구를 만들고 독일에서 건조한 목재로 집을 짓는다. 조상님들은 가야산 인근에서 자라는 산벚나무·돌배나무로 팔만대장경 목판까지 만들었는데 말이다. 용비어천가의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곶 됴코 여름하나니’, 뿌리 깊은 나무가 꽃이 좋고 열매가 많이 열린다. 그뿐인가, 꽃이 좋은 나무는 유독 단단하다.

인문학자들의 방문으로 문학에서 역사에서 또 여행지에서 마주친 꽃나무들을 불러 봤다. 분명한 것은 꽃이 좋은 나무가 목재도 좋다. 눈부신 동백꽃·벚꽃·배꽃 앞에서 나무쟁이의 속내가 또 이렇게 드러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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