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의 열정과 절망 담아낸 편지들

김진철 2021. 3. 1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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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로서 나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두렵다. 나는 돈도 없고 땅도 뺐겼다."

1946년 3월20일, 38선 이북 지역에 살던 부유한 지주가 서울의 아들에게 적어보낸 편지의 일부다.

정용욱 서울대 교수가 쓴 <편지로 읽는 해방과 점령> 은 미군정기에 씌어진 편지들의 내용과 맥락, 발신인과 수취인 등을 분석해 당대의 정치사회적 현실, 인민들의 생각과 삶을 읽어낸다.

지주 아버지의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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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읽는 해방과 점령

정용욱 지음/민음사·2만3000원

“지주로서 나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두렵다. 나는 돈도 없고 땅도 뺐겼다.”

1946년 3월20일, 38선 이북 지역에 살던 부유한 지주가 서울의 아들에게 적어보낸 편지의 일부다. 당시 소련 점령 치하에서 인민위원회 주도로 진행된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한 지주계급의 당혹감과 불안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는 왜 이 편지를 썼을까? 이 사적인 편지는 어떤 경로로 70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뛰어 우리 앞에 전해진 것일까?

정용욱 서울대 교수가 쓴 <편지로 읽는 해방과 점령>은 미군정기에 씌어진 편지들의 내용과 맥락, 발신인과 수취인 등을 분석해 당대의 정치사회적 현실, 인민들의 생각과 삶을 읽어낸다. 글쓴이가 분석대상으로 삼은 편지는 미군정청 관리에게 식량위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민원 편지부터, 죽산 조봉암이 조선공산당 서기 박헌영에게 그동안의 과오와 당 운영의 문제점을 정중하면서도 신랄하게 지적한 정치 서신, 미국 대통령의 특사로 현지조사차 방문한 미군 장성에게 우익단체들의 백색테러를 고발하는 농민의 탄원서까지 다양하다.

서신들은 한결같이 혼란스럽지만 열정적이었고 때로는 절망적이었을 해방공간의 사회상을 생생하게 드러내는데, 이 편지들이 연구자의 손에 입수된 과정도 흥미롭다. 미군은 1945년 한반도 진주 초기부터 여론 동향을 탐지·분석하기 위해 서신검열 전담기구를 설치했는데, 이곳에선 한국인 정치인들끼리 주고받은 서신은 물론, 보통사람들의 편지도 일정 비율을 임의 추출해 검열했다. 이 편지들이 미국 국립문서고에서 70년 가까이 잠자고 있다가 눈 밝은 연구자를 통해 당대의 현실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1차 사료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지주 아버지의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집이 공산주의자의 소유라면 몰수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네가 인민당 당원이니 그들에게 너의 당원증을 보여 주면 인민당이나 공산당이나 도긴개긴이므로 내 집을 몰수하지 않을 것이다. 가능한 한 빨리 이리로 오너라!” 공산정권 수립이 현실화돼가는 상황에서 집 한 채라도 건져보려는 지주의 절박함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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