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죽음과 함께 저물어간 아테네

한겨레 2021. 3. 1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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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축제의 땅, 김헌의 그리스 기행]아테나 여신의 찬란한 도시는 스파르타에 패배하여 기울고
독배 든 현인은 철학의 완성을 위해 육체 감옥에서 벗어나다

[책&생각] 신화와 축제의 땅, 김헌의 그리스 기행

⑰ 현자의 죽음과 아테네의 쇠퇴

아테네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했던 파르테논 신전. 김헌 제공

크레타섬을 떠나 산토리니를 거쳐 아테네로 향했다. 크루즈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리자, 산토리니섬의 집집마다 조명이 켜지면서 별처럼 반짝였다. 섬에서 멀어지고 주변이 깜깜해지자 선체에 부딪치는 바닷물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에게해를 가르며 아테네로 향하는 배의 여정은 두 사람의 죽음을 떠오르게 했다.

첫째는 아이게우스의 죽음이다. 크레타섬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아테네로 돌아가는 테세우스는 검은 돛을 내리고 흰 돛을 올리지 못해 아버지 아이게우스를 절망에 빠뜨리고 절벽 밑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아이게우스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다 바다에 몸을 던지고 이 바다에 자신의 이름을 줄 터이다. 그래서 이 바다는 아이게우스의 바다, 곧 에게해가 된다.

둘째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크레타로 가는 길에 델로스에 들른 테세우스는 아폴론 신에게 기도했다.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르게 해주신다면, 델로스로 제의의 배를 띄우겠습니다.’ 그 이후로 매년 아테네인들은 보은의 배를 델로스섬으로 보냈는데, 그 배가 돌아오기 전까지 소크라테스의 사형이 미뤄졌다. 그러나 이 배가 아테네에 닿는 순간,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셔야 한다. 지금쯤 소크라테스는 친구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생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철학은 죽음을 위한 연습이다

델로스에서 출발한 배가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은 소크라테스의 친구와 제자들은 서둘러 감옥으로 모여들었다. 소크라테스를 구할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처럼 독배를 고대하는 모습이었다. 왜일까?

그는 죽음이 몸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사건이라 믿었다. 그것은 영혼의 해방이다. 반면 이승에서의 삶이란 육체의 감옥에 갇힌 영혼의 수감생활을 뜻한다. 감옥에 갇힌 소크라테스가 탈옥한들, 영혼은 여전히 육체에 갇힌 상태니 그게 그거였다. 반면 독배를 마시고 죽는다면, 영혼은 몸을 벗어나서 진정한 탈옥, 영원한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한 이유도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철학이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인데, 육체의 감각은 언제나 인식의 혼란만 초래한다. 육체적 간섭을 배제하고 영혼을 맑게 유지해야만 진리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육체로부터 영혼을 분리하는 훈련, 그것이 철학이다. 따라서 철학은 죽음과 아주 비슷하다. 진정한 철학은 죽음을 위한 연습인 셈이다. 그러니 죽음으로써 철학이 완성되려는 순간, 왜 탈옥함으로써 육체의 감옥에 계속 갇히는 길을 선택하겠는가?

날이 밝았다. 소크라테스는 기꺼이 독배를 들었다. 그리고 절친 크리톤에게 말했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 빚이 있네. 꼭 갚아주게.”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이다. 이 땅에서의 삶 자체가 육체에 갇힌 영혼이 병을 앓는 것이라 생각했던 소크라테스는 이제 죽음으로써 그 지독한 병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빚’이라고 표현했고, 그 빚은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이 내리는 은혜라 생각한 것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서남쪽 필로파포스 언덕에는 소크라테스가 갇혔다는 감옥이 있다. 진짜 거기서 소크라테스가 죽었을까?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서양철학, 특히 고대 그리스 철학을 공부한 사람에겐 성지와도 같은 곳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모습을 그려보면 몇 권의 책과 논문을 읽는 것보다 더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

소크라테스의 감옥. 김헌 제공

아테네의 황금시대와 파르테논 신전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전에 페르시아가 아테네를 두 차례 침략했다. 두 번째 침략에서 페르시아군은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과 300인의 정예전사를 전멸시키고 아테네까지 내려왔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 아테나 여신의 신전을 파괴했다. 도시의 수호신을 짓밟은 페르시아인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승부는 바다에서 났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 해군은 좁은 해협으로 페르시아 함선을 유도해 그야말로 박살을 낸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지략의 승리였다.

이를 계기로 아테네는 에게해를 지배하는 해상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도발을 막기 위해 에게해의 섬들과 그리스 본토의 해변과 소아시아 서쪽 해변의 해안 도시 300여개를 묶는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고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페리클레스가 나타나 델로스 동맹의 중심지를 아테네로 옮겨왔다. 아테네는 군사,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고, 문화의 발전과 함께 황금시대를 활짝 열었다. 소크라테스가 바로 이 시대에 활동했던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아크로폴리스를 비롯한 아테네를 복원하고 위풍당당한 도시로 조성해 나갔다. 아테네와 그리스 문명, 나아가 서구 문명 자체를 상징하는 파르테논 신전이 그의 대표적인 업적이었다. 그리스 말로 ‘파르테노스’는 ‘미혼 여성’을 뜻한다. ‘미혼 여성의 집’이라는 뜻의 ‘파르테논’은 아테나 여신의 신전을 가리킨다.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된 아테네 여신의 신전을 새롭게, 더욱 웅장하게 건설함으로써 아테네의 부흥을 만천하에 알리는 동시에 델로스섬에 있었던 동맹의 금고를 파르테논으로 옮겨왔다. 신전만큼 동맹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관할 만한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당대 최고 조각가였던 페이디아스가 만든 어마어마한 크기의 아테나 여신상에는 황금이 입혀졌는데, 그것은 황금을 가장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아테나 여신 기리는 ‘판아테나이아’ 축제

신화에 따르면, 케크롭스가 도시를 세우자, 거기에 ‘케크로피아’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이 도시를 두고 아테나 여신과 포세이돈이 수호신을 자처하고 나섰다. 둘은 시민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경쟁했다. 포세이돈은 삼지창으로 바위를 쳐서 바닷물이 솟구치게 하여 사람들의 경탄과 공포를 자아냈다. 반면 아테나는 올리브나무를 자라나게 했다. 파릇한 열매가 열리고 그것에서 기름을 짜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시민들은 아테나 여신을 수호신으로 삼았다. 그때부터 도시의 이름도 여신의 이름을 따라 ‘아테네’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테나 여신을 기리는 ‘판아테나이아’ 축제도 열렸다고 한다. 이 축제는 아테나 여신의 생일축하 잔치였다.

아테나 여신의 탄생에는 신비로운 전설이 있다. 제우스가 권좌에 올랐을 때, 그의 첫 아내는 지혜롭고 아름다운 메티스 여신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태어나는 자식이 제우스를 몰아낼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 제우스는 메티스를 꿀꺽 삼켰다. 그러나 메티스가 잉태한 아이는 제우스의 머릿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두통에 시달리던 제우스의 머리를 프로메테우스(또는 헤파이스토스)가 도끼로 치자, 쪼개진 틈으로 완전무장을 갖춘 아테나 여신이 튀어나왔다.

8월 중순께 아테네 시민들은 파르테논의 거상에 입힐 옷을 마련하여 도심을 통과하는 장엄한 행렬을 벌였다. 기원전 566년부터는 대규모 운동경기를 개최하였고, 4년마다 한 번씩 올림피아 제전에 버금갈 만한 범그리스 축제를 열어 그리스 전 지역의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우승자에게는 손잡이가 둘 달린 커다란 암포라 도자기에 신성한 올리브나무에서 추출한 양질의 기름을 듬뿍 담아 상품으로 주었다. 도자기의 한 면에는 아테나 여신의 모습이 새겨졌고, 다른 면에는 우승 종목을 그렸다. 우승 트로피의 원조라 할 수 있겠다.

파르테논 신전의 건설은 기원전 447년 페리클레스의 기획으로 시작되었고, 기원전 432년에 장식이 마무리되면서 완성되었다. 그 이듬해,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전쟁을 시작했다. 2년이 채 되지 않아, 페리클레스는 그리스에 번진 전염병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를 잃은 아테네는 27년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얼마 후,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그는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아테네의 전성기가 저물어갔다.

김헌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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