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 김병로의 길, 윤석열의 길

김환기 2021. 3. 10.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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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판결 불만 표명하자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 반박
권력비리 수사 좌고우면 안 해
정의·법치 수호 검사직분 충실

“판사가 내린 판결은 대법원장인 나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의가 있으면 절차를 밟아 항소하시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법원의 판결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한 이승만 전 대통령을 겨냥해 한 말이다. 사법부 독립을 수호하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인사권자에게 맞서는 건 자리를 내놓을 각오 없이는 하지 못할 일 아닌가.

김병로의 가장 큰 공적은 사법부 독립의 기초를 닦은 일이다. 사법부가 집권세력의 권력 남용을 막는 방파제,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최후 보루가 돼야 한다는 소신이 확고했다. 이런 대법원장이 있었기에 판사들은 권력 눈치를 보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할 수 있었다. 초대 대법원장이 판사의 책무가 무엇인지 실천으로 보여줘 본받아야 할 사표가 된 것은 사법부로서는 큰 선물이다. 불의에 저항한 김병로는 국민에게 가장 존경받는 법조인이 됐다. 개인을 넘어 사법부의 영광이다.
김환기 논설위원
검찰로 시선을 돌려보자. 김병로에 비견될 만큼 법치 수호에 힘을 쏟은 검찰총장이 있었을까. 많은 국민이 여권의 중대범죄수사청 설치법 강행에 반발하며 사퇴한 윤석열 총장을 지목할 것이다.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면서 좌고우면하지 않은 데다 종국에는 사표까지 던진 검찰총장은 윤석열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나는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검사가 임관할 때 오른손을 들고 하는 검사 선서의 일부분이다. 정의와 인권 수호, 공평무사한 수사, 국민과 국가를 위한 헌신이 검사의 직분임을 알 수 있다. 2009년 시행됐기에 윤석열이 이런 선서를 하지는 않았지만 검사의 직분에 그만큼 충실한 이도 드물다.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과 월성원전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 의혹 수사는 그가 없었으면 착수조차 못했을 것이다.

여권은 ‘정치검찰의 끝판왕’이라고 윤석열을 공격하지만 가당치 않다. 정치검사가 뭔가. 권력자에 대한 수사를 뭉개거나 면죄부를 주고 야권에는 더 날카로운 수사 칼날을 들이대는 검사를 지칭하는 것 아닌가. 법치가 정치로 덮이는 데 부역하고 있는 ‘친정부’ 성향, ‘추미애 라인’ 검사들이야말로 정치검사의 전형이다.

승진에 눈이 먼 정치검사들은 “너도 검사냐”는 말을 듣고도 부끄러움을 모른 채 여권의 가려운 곳 긁어주기 경쟁을 벌인다. 국가와 국민에 대한 봉사를 정권 보위를 위한 ‘충견’ 역할로 오독하니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이런 진짜 정치검사를 감싸고 권력 비리를 파헤치는 검사를 정치검찰로 매도하는 여권의 행태는 반법치를 조장한다. 국정원 댓글과 적폐청산 수사 때는 윤석열을 칭송하다가 조국 일가 비리 수사에 착수하자 돌변해 정치검찰이라고 비판한 것이 대표적이다.

여권이 검찰을 해체하면 권력형 비리를 덮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오산이다. 중대범죄 수사 역량을 떨어뜨려 권력층만 살판나고 국민을 피해자로 만드는 중수청 설치는 중단해야 마땅하다. 윤석열은 검사의 책무가 무엇인지 실천으로 보여주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의 정의감과 법치주의 수호 의지는 중병을 앓는 한국 민주주의에 비추어 더욱 빛을 발한다.

정의와 공정, 도덕성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민주독재가 심화되고 있다. 촛불 정신을 받들겠다는 정부와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586 정치인들이 만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다. “권력층의 반칙에 대응하지 못하면 공정과 민주주의가 무너진다”는 윤석열의 경고를 새겨들어야 할 때다.

검찰 내부망에 올려진 윤석열의 퇴임사에는 “총장이 적절한 시기에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잘 맞섰다”는 댓글이 적지 않다고 한다. 검찰이 살아 남는다면 임관식에서 선서를 하며 윤석열이 걸어간 길을 떠올리는 후배 검사가 많아질 것 같다.

김환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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