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의 마법'에 걸린 드라마.. 브레이크가 없다

김예진 2021. 3. 9.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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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트하우스2' 열풍 왜
지상파 메인으로 등극
아침 시간대 '재밋거리'로 치부되다
시청률 상승하자 '신분' 뒤바뀌어
메인뉴스 직전에 방영하는 간판 돼
'순옥드' 즐기는 시청자
기승전결이 아닌 기결기결 속도감
개연성과 현실성은 안중에도 없어
"아예 판타지물로 보면 더 흥미진진"
남은 과제들 뭔가
학폭과 살인 등 노골적인 묘사 급급
방송국 고민이나 문제의식 안보여
청소년 노출에 안전장치 마련해야
2021년 한국 드라마계에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 쾌락주의라는 유령이.
한때 ‘막장’이라는 비유마저 탄광 노동자들의 신성한 일터에 대한 모독이라 비난받았던 이 드라마 유형은 ‘아줌마’들이 아침식사 뒤치다꺼리나 저녁식사 준비하는 시간에 부엌에서 건성으로 봐도 이해되기 좋고 대충봐도 스트레스가 풀리도록 만든 것이라고 설명되곤 했다. 서사를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쓸 필요도 없으며 등장인물들이 허구한 날 싸우며 소리를 질러대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모욕적이고 차별적인 해설에 기반해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상황은 바뀌었다. ‘일류’ 직장에 출퇴근을 하는 ‘교양 있는’ 사회인이라면 볼 수 없는 시간대에 주로 방영되던 이 드라마는 이제 재방송마저 지상파 메인 뉴스 직전에 편성되는 방송국의 간판이 됐다. 시즌1에 대한 애프터서비스를 해주듯 하는 시청자 우선주의까지 보여줘 시작부터 시청자 환호성을 받았다. 시즌1에서 ‘병약 섹시미’라 불리며 예기치 않은 인기를 얻은 남자 주인공이 시즌 2에서 돌연 강인하고 성공한 남자가 된 모습을 잠시나마 보여주는가 하면, ‘제발 죽이지 말아달라’는 시청자의 호소를 잊지 않았다는 듯 죽었던 등장인물을 더 멋진 모습으로 부활시켰다. 개연성과 현실성은 안중에 없다. 오직 전개의 흥미진진함과 속도가 주는 쾌락만으로 채워진다. 정치적 올바름, 비평적 태도를 유지하려는 이들을 ‘내려놓으면 편하다’고 꾀어낸다. 끝내 ‘막장드라마’라 비하되던 자신을 ‘이야기의 스펙터클’로 진화시켰다. 바로 SBS 금토극 ‘펜트하우스2’ 얘기다.

◆‘순옥드’를 즐기는 시청자

펜트하우스2 시청률이 매회 멈추지 않고 오르고 있다. 1회 19.1%에서 지난 6일 방영된 6회는 26.9%를 기록했다. 시즌1을 보지 않았던 시청자들도 합류했다. 애청자라고 밝힌 한 30대 여성은 8일 “펜트하우스1이 방송될 때 일어난 논란을 보는 것도 불편했는데, 지금은 아예 판타지물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그렇게 흥미진진할 수가 없더라”고 말했다.
시청률은 드라마의 인기를 설명하는 하나의 작은 지표일 뿐이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는 이 드라마의 휘몰아치는 전개 속도, 개연성 없음, 선을 넘는 비윤리성과 같은 막장 요소를 오히려 고유한 특징으로 이해하고 즐기는 놀이가 한창이다.

이들은 김순옥 작가의 막장드라마 계보를 열거하며 ‘순옥드’라 부른다. 소셜미디어에 퍼져있는 ‘펜트하우스 시청 유의사항’에는 순옥드에 대한 애정이 흘러 넘친다. ‘순옥드는 산으로 가지 않는다. 산에서 시작해 안드로메다로 간다’, ‘순옥드에 ‘왜’란 없다. ‘와’만 있을 뿐이다’, ‘순옥드에 의문 가지는 사람은 펜트하우스 볼 자세가 안 돼 있다’, ‘시체 없음 뭐다?’, ‘부검할 때까지는 죽은 게 아니다’의 내용으로 된 5계명이다. 이들은 이 5계명을 퍼뜨리며 “달달 외우자”고 다짐한다. ‘#순옥드는아무생각없이보는것이다’, ‘#순옥드는끝나도끝난게아니다’처럼 추신 같은 해시태그를 덧붙인다.

‘기승전결이 아니라 기결기결이다’, ‘전개속도가 5G다’, ‘순옥드병=죽음을 믿지 않는다’, ‘순옥드 특성 상 미국에선 모든 병을 완치시킨다’고 댓글놀이를 하기도 한다. 융단폭격식 전개에 현기증이 난다고 고통스러워하다가도 두통의 원인으로 ‘스트레스와 펜트하우스’를 꼽으며 즐거워한다. ‘마라맛’이라고 부르며 중독성을 칭송한 건 이미 오래전 일. 이젠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며 본방 사수 인증샷을 남긴다.
◆과거 인터뷰도 화제

‘과몰입 방지’라는 글귀를 붙여 확산시키는 게시물들은 이들이 드라마의 비현실성을 상기시키며 거리두기를 하는 집단지성을 발휘 중인 것은 아닐까, 희망적 해석까지 하게 한다. 악역인 배우들이 카메라가 돌지 않을 때 순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공유하며 ‘과몰입방지위원회’, ‘과몰입방지턱’과 같은 문구를 붙이는 식이다. 현실이라면 어떤 범죄에 해당하는지 적어 놓은 길고 긴 적용 범죄목록도 마찬가지다.

시청자들의 태도가 달라진 데에는 김순옥 작가의 과거 인터뷰가 다시 회자된 이유도 커 보인다. 2011년 모교 대학생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다. 막장드라마라며 비난을 받고 있다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나쁜 바이러스를 대중에게 주는 나쁜 짓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에 너무 괴롭더라고요. 그때가 ‘아내의 유혹’을 할 때였는데, 드라마 하는 시간에 (병원에서) 사람들이 다 모여가지고 그것을 넋을 놓고 보더래요. 그때 그 사람들은 정말 괴로운데 사람들이 그 시간 40분 동안에는 고통이나 자기가 혹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잊게 해줬다는 것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졌어요.”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방식이 다매체·다채널화됐고, 동시에 전 세계 온갖 드라마를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이 같은 현상이 가능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과거엔 지상파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고 누구나 지상파 시청 상황에 노출됨을 전제로 상식선에서 보편적 시청자를 대상으로 윤리성과 드라마가 (갖춰야 할) 조건들을 댔다. 특히 비윤리성에는 굉장히 민감했다. 하지만 지금은 수많은 콘텐츠 중 하나를 시청자가 골라서 보는 시대로 들어왔다. 기존 막장드라마 역시 수많은 드라마 중 하나, 취향의 일부로 보고 인정해주는 식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드라마는 이런 부류고 이런 재미로 보는 거다’ 하는 방식으로 시청 관점이 바뀐 셈인데, (막장드라마가) 바람직하다고 하긴 어렵지만 그걸 좋아하는 것도 하나의 취향이기 때문에 뭐라 하기 어려워진 것”이라고 했다.
◆여전한 과제

막장드라마를 하나의 유형으로 인정하고 시청자들이 고유의 시청 방법을 정해 향유하는 현상은 긍정적이다. 막장 요소가 주는 쾌감은 강점으로 효용성을 갖게 하면서도, 시청자들이 성숙한 거리두기를 하면 막장드라마가 현실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차단될 수 있어서다.

수용자인 시청자들에 비해 공급자인 방송사의 태도는 씁쓸하다. 가령 SBS 공식 트위터 계정이 방송을 홍보하기 위해 올린 게시물들을 보면 선을 넘는다.

지난 5일 SBS는 5회 장면 중 여고생인 하은별이 친구 배로나를 죽게 해 하얀 드레스가 피투성이가 된 모습의 스틸컷과 함께 ‘청아예술제의 미친 결말!’이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22일 올린 게시물에는 ‘갈매기까지 죽이는 펜트하우스2. 2회 2사망. 방심할 수 없는 사망씬’이라고 했다. 사회적으로 학교폭력 문제가 심각하게 부상한 시점은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다. 막장 요소만 팔겠다는 심산도 노골적이다.

가상의 설정임을 주지하고 19세 이상 시청가능 등급임을 표기하는 드라마와 달리, SNS는 청소년 보호 시간대와 상관없이 무차별 노출되는 만큼 더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 보인다. 지난 1월 시즌1이 왜 방송통신심의원회로부터 법정 제재를 받았는지도 잊은 듯하다. 펜트하우스2와 같은 자극적 드라마를 앞으로 지상파 안에서 어떻게 배치하고 방영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나 문제의식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 제작 자체 못지않게, 적절하게 즐기고 사회가 소화할 수 있게 하는 장치도 중요하다. 정 평론가는 “지상파도 콘텐츠의 자유도를 넓혀주고 다양한 콘텐츠를 다 담을 수 있게 해줄 필요가 있지만, 동시에 등급을 정확히 매기는 장치처럼 보는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고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안전장치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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