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36] 자발적 매춘? 일본은 점령지서 네덜란드 여성들도 끌고갔다

주경철 교수 2021. 3. 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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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의 명백한 증거, 1944년 스마랑 위안소
영국 화가 제임스 샌트가 1850년 그린 유화 ‘용기, 근심 그리고 절망-전투를 지켜보는 여인들’. 앞쪽 칼을 든 여인이 전투 상황을 주시하면서 다른 여인들을 보호하고 있다. 전쟁 과정에서 여성의 인권은 유린되기 쉽다. 제국주의 일본은 1944년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뒤 ‘적성국 여성 수용소’의 유럽 여성들도 소위 ‘위안소’로 끌고 갔다. 이 추악한 전쟁 범죄가 폭로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네덜란드인 피해자 얀 러프 오헤른(1923~2019) 여사가 침묵을 깨고 용기를 내 증언해주었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

태평양전쟁 당시 소위 ‘위안부’로 징발된 희생자 중에는 한국과 중국, 필리핀 등 아시아 여성들 외에 유럽 여성들도 있었다.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가 일본에 점령당한 이후 위안부로 끌려간 네덜란드 여성들이 그런 사례다. 이 경우 종전 후 전범 재판 과정에서 만들어진 조사 보고서가 후일 재발견되었고, 여기에 더해 희생자 중 한 명인 얀 러프-오헤른(Jan Ruff-O’Herne, 1923-2019) 여사가 50년 만에 침묵을 깨고 용기를 내어 증언을 한 덕분에 당시 사정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보고서에 의하면 1944년 2월 일본군 당국자와 인도네시아 경찰이 자바 중부 지역에 있는 ‘적성국 여성 수용소’들을 방문하여 18~28세 여성들의 목록을 요구했다. 이들은 며칠 후 다시 나타나 지명된 여성들에게 한 시간 안에 짐을 싸서 차에 타라고 명령했다. 이 여성들에게는 외부에서 노역한다고만 말했을 뿐 위안부 이야기는 숨기고 하지 않았다. 안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어머니와 가족들이 울부짖으며 쫓아가려 하자 군인들이 공중에 총을 쏘며 제지했다.

검진하러 온 일본 의사가 강간

네덜란드 ‘위안부’ 8명이 쓴 수기집 ‘짓밟힌 꽃’ 표지.

징발된 여성들은 스마랑(Semarang) 시 외곽에 있는 식민지 관리소 건물로 끌려가서 계약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받았다. 당시 이들은 서명을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계약서가 일본어로 쓰여 있어서 이해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계약서 내용은 성 노동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 일본 의사가 찾아와 검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여성은 의사에게 강간당했다고 증언했다(이 의사는 전후에 자살했다). 곧 이들은 세이운소, 후타바소, 히노마루, 쇼코클럽 등 4곳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본격적으로 영업이 시작되자 군인과 민간인 ‘고객들’은 예약 후 이곳을 방문했는데, 민간인은 3길더, 군인은 1.5길더를 지불했으며, 이 액수 중 30%가 위안부 여성에게 돌아갔다. 위안부 여성은 이 돈으로 음식을 사는 외에, 스스로 돈을 지불하는 대신 쉬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오헤른의 경우 언니가 스마랑 시내의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어서 이 병원 의사인 지켈(Dr. Zikel)씨와 그의 일본인 친구 아오야기씨를 통해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예약을 한 후 위안소를 방문하지 않는 방식으로 동생을 보호하려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방법도 한계가 있어서 결국 오헤른은 성적 학대를 피할 수 없었다. 다른 여성 중에도 이처럼 외부의 도움을 받아 그나마 조금 나은 생활을 하는 수가 있었다. 반면 일부 나이 많은 여성들은 술 취한 사람 혹은 성병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다른 젊은 여성들에게 보내서 힘들게 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스마랑의 위안소들은 개소 후 두 달 만에 급히 폐쇄되었다. 군인들이 찾아와서 이곳 여성들에게 강제로 끌려왔는지 자의로 왔는지를 묻고 갔다는 증언을 보면 아마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 군 상부에서 급히 폐쇄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36명의 네덜란드 여성 위안부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고 전황의 변화에 따라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1945년 10월, 네덜란드 정부가 전범 재판을 열고 이에 필요한 증거 조사 작업을 벌였다. 여성들을 강제 동원한 일본군 책임자들은 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49년 2월, 바타비아(자카르타) 임시군사재판소에서 13명의 피고 가운데 책임자 오카다 게이지(岡田慶治) 육군 소좌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다른 피고들은 2~20년 형을 선고받았다. 후일 이 보고서의 존재를 확인한 네덜란드 정부가 연구를 진행한 결과, 위안소에 200~300명의 네덜란드 여성이 있었는데 이 중 최소 65명이 명백하게 강제 연행되어 성적 행위를 강요받았다고 확인했다. 이것은 일본 정부가 강제 연행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예외적 사례로서 의미가 깊다.

학술적으로 엄밀한 연구 진행해야

그런데 이 조사보고서의 내용과 오헤른의 증언을 비교해 보면 실상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헤른은 지켈 박사와 아오야기씨가 상당히 힘들게 노력하여 도움을 준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다른 사람들의 증언에서도 자주 보이는 일이지만, 위안소에서 상대적으로 좋은 대접을 받았다든지 혹은 외부인, 특히 일본인의 도움을 받았다는 식의 내용은 웬만하면 기술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되기 십상이고, 비난을 초래할지 모르는 내용을 변형시키거나 없애는 식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추측건대 우리나라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이 일부 바뀌는 것 또한 이런 현상일 수 있다.

여기에 연구의 어려움이 있지만, 그렇다고 희생자들을 비난하고 몰아붙일 일은 아니다. 이런 사정을 충분히 감안하여 이분들의 존엄을 지켜주면서 최대한 학술적으로 엄밀한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무엇보다 희생자들의 진솔한 증언을 최대한 폭넓게 수집했어야 마땅하다. 안타깝지만 이미 많은 분이 유명을 달리하여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 프랑스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클로드 란츠만 사례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1년 동안 전 세계를 돌며 수많은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관련자들을 만나서 총 350시간 분량의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를 편집하여 9시간 30분짜리 작품인 ‘쇼아(shoah)’(1985)를 내놓았다. 이 작품에 대한 논란도 많으나, 고난의 기억을 최대한 지켜내려는 지극한 노력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유형의 희생자·가해자·방조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극한 상황에 몰린 인간들이 겪어야 했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 앞에 숙연한 마음이 든다.

램지어, 사료 검토없이 편향적 결론

램지어 교수의 경우 사료에 대한 정밀한 검토 없이 편향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전통적 관점과 수정주의적 관점 사이에 논쟁이 진행 중이고, 그 각각의 주장을 지지하는 많은 자료가 있다. 램지어 교수는 이런 사정을 무시하고 출처도 불확실한 사례 한두 건을 인용한 다음 이 복잡하고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깔끔하게 이론적 정리를 하겠다고 나선다.

그 시대 상황에서 친족들의 억압을 피하기 위해, 혹은 빚더미에 몰려 일본군을 쫓아간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하자. 그런 딱한 사정에 몰린 사람들을 데려다가 비인간적인 성노예 제도를 운영한 데 대해 면죄부를 주려는 듯, 희생자들을 ‘자발적 매춘부’라고 지칭하는 것은 학문 연구의 기초를 따지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도리가 아니다. 다만 우리 또한 지나치게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냉철한 학술적 대응이 필요해 보인다.

“일본 군인들이 들어와… 난 그저 끌려온 사냥감”

한국 보고 용기낸 오헤른의 증언

오헤른씨는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에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서 1992년 도쿄에서 있었던 일본전쟁범죄국제공청회, 그리고 2007년 미국 의회에서 자신의 경험에 대해 증언했다. 1994년 출판한 ’50년의 침묵'이라는 비망록에는 그녀가 겪었던 지옥 같은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에 소위 ‘위안부’로 징발된 피해자였던 네덜란드인 얀 러프 오헤른 여사는 2015년 본지 인터뷰에서 “100명도 넘는 여성이 조직적으로 강간당했고, 함께 있던 다른 네덜란드 소녀는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고 증언했다. /김형원 기자

“일본 간수가 10명의 소녀를 선발했다. 나는 그 열 명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통역을 통해 짐을 싸서 수용소 정문으로 가서 트럭에 타라고 시켰다. 엄마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의 인사를 해야 했다. 엄마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단지 눈을 바라보다가 서로 껴안았다... 위안소에서 기다리는 동안 공포가 온몸을 감쌌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공포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위안소가 문을 연 날, 마침내 한 일본군 장교를 맞아들였다. 나는 그 사람의 정강이를 발로 찼지만, 그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는 나를 침실로 끌고 가서 문을 닫았다. 나는 영어와 인도네시아어를 섞어서 내 의지에 반해 여기 끌려온 것이라고 사정했다. 나는 도망가지 못하는 사냥감처럼 구석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나를 강간하며 때로 죽이겠다고 협박했고, 때로 심하게 때렸다.”

적어도 이 사례를 보면 램지어 교수가 말하듯 여성들이 ‘위험과 금전적 보상을 비교한 후 스스로 매춘 계약을 맺은’ 것 같지도 않고, ‘경매시장의 특성과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연구한 게임이론’을 가져와서 설명할 일도 아닌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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