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만난세상] 바퀴를 굴리면 보이는 것들

김유나 2021. 3. 8.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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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곡역 2번 출구 옆, 가양역 9번 출구 옆.' 육아휴직 기간 외우고 다녔던 지하철역 출구 목록이다.

말 못하는 아이와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생활에 지쳤던 나는 아이를 데리고 일주일에 세 번 문화센터에 갔다.

'어? 엘리베이터가 어디 있지?' 몇 년간 출퇴근하며 매일 드나들던 곳인데, 그동안 엘리베이터의 존재를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나와 상관 없어 보이는 지하철역 엘리베이터도 언젠가 나를 위한 시설이란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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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곡역 2번 출구 옆, 가양역 9번 출구 옆….’ 육아휴직 기간 외우고 다녔던 지하철역 출구 목록이다. 말 못하는 아이와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생활에 지쳤던 나는 아이를 데리고 일주일에 세 번 문화센터에 갔다. 육아에 찌든 삶에 문화센터는 한 줄기 빛이었다.

여정은 쉽지 않았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문화센터가 있는 마트 앞에 내릴 수 있지만, 버스는 유모차를 가지고 타기 어려웠다. 결국 빙 돌아가야 하고 내려서 많이 걷더라도 지하철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첫날, 호기롭게 유모차를 밀고 지하철역에 갔다가 당황했다. ‘어? 엘리베이터가 어디 있지?’ 몇 년간 출퇴근하며 매일 드나들던 곳인데, 그동안 엘리베이터의 존재를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색 끝에 횡단보도를 두 차례 건너야 하는 대각선 방향에서 엘리베이터를 발견했다. 목적지 역에 내려서도 엘리베이터를 찾아 헤맸다. 그때부터 새로운 역 출구를 외웠다. 어디를 갈 때면 그 역에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검색하는 게 습관이 됐다.
김유나 사회부 기자
복병은 많았다. 출구엔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환승 통로엔 없는 식이다. 한번은 끝없이 펼쳐진 계단을 보며 망연자실하다가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 달라’는 안내문을 보고 전화하니 한참 후 귀찮은 표정의 공익근무요원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나는 아이를 안고, 그는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어찌나 눈치가 보이던지. 감사하단 말에도 그는 대꾸 없이 돌아갔다. 당황스러움과 미안함, 고마움이 섞인 감정 사이에서 불쑥 억울함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 엘리베이터를 안 만든 게 잘못 아닌가?’ 그의 싸늘한 시선은 가슴에 오래 박혔다.

장애인 이동권이 부실한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를 여러 번 썼지만 그 문제 자체에 대해 깊이 고민한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유모차를 밀고 다니면서 나는 비로소 한국 사회가 ‘바퀴 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불친절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서울교통공사가 지난달 지하철 4호선에서 시위를 벌였던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단체의 요구는 ‘모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해달라’는 것.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서울 지하철에 아직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역이 있기 때문이다. ‘왜’ 시위를 했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시민이 피해를 봤다’며 고소한다는 공사를 보니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모든 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냐. 장애인은 이기적이다’란 댓글도 보였다.

어떤 역에 계단이 없어 승강장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역 관리자가 “이 역엔 계단이 없지만 근처 역엔 있으니 거기로 가라”고 하면 황당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런 황당한 일을 일상으로 겪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에겐 ‘여건이 되면’ 만드는 부가시설로 여겨지는 엘리베이터가 누군가에겐 절실한 이동수단인 것이다.

많은 이가 엘리베이터는 장애인을 위한 시설로 여긴다. 그러나 유모차 이용자나 임산부, 노인에게도 꼭 필요하다.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늙지 않는 사람은 없다. 지금 나와 상관 없어 보이는 지하철역 엘리베이터도 언젠가 나를 위한 시설이란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김유나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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