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녀들은 살아남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다[플랫]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2021. 3. 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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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켄들은 '모두'의 페미니즘에서 소외된 목소리들을 전한다. mikkikendall.com

[경향신문]
“페미니즘이 총과 무슨 상관일까? 총은 페미니즘 이슈가 아니지 않은가. 사실은 맞다. 단지 어떤 여성의 삶에서는 페미니즘 이슈가 아닐 뿐이다. 그렇지만 많은 여성들, 특히 저임금 공동체에 속한 여성들은 매일같이 총기폭력을 마주해야 한다. 가정폭력 상황에서 총의 존재는 여성의 사망률을 5배 높인다. … 우리는 총기 사고에 노출된 젊은 남성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지만, 소녀들 역시 총기로부터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 소녀들이 총격이 빈번한 지역을 지나지 않기 위해 학교를 중퇴하는 비율은 소년들의 중퇴율과 비슷하다─말하자면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다.”

미키 켄들의 이력은 여느 페미니스트 작가와 다르다. 1976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난 켄들은 빈곤층 비율이 높고 흑인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군대에 들어갔고, 제대 군인을 위한 장학금을 받아 겨우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학계에서 페미니즘을 배우지 않았으며, 기자나 에세이스트로 경력을 쌓지도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책 <모든 여성은 같은 투쟁을 하지 않는다>를 통해 지난해 영미권에서 주목받는 작가가 됐다.

2020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티에서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 참가자들이 행진하는 모습. 흑인 페미니스트는 때로는 백인 페미니스트보다 흑인 남성과의 연대가 더 필요할 수도 있다. AFP연합뉴스




여러모로 인상적인 책이다. 켄들은 흑인 페미니스트로서 ‘백인 주류 페미니스트’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무엇보다 흔히 ‘페미니즘 이슈’로 여겨지지 않는 우리 삶의 문제들을 날카롭게 성찰한다. 총기, 주거, 정치, 교육, 의료, 식량 불안, 젠트리피케이션 등 거의 모든 사회적 이슈들이다. 이것들이 왜 페미니즘 이슈냐는 질문에 켄들은 답한다. “단지 어떤 여성의 삶에서는 페미니즘 이슈가 아닐 뿐”이라고.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라는 구호에서 누락됐던 흑인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약자의 목소리를 직설적으로 전한다.

책 원제는 ‘후드 페미니즘(Hood Feminism)’이다. 뒷골목에 대한 은유로 쓰이는 ‘후드’는 켄들이 자라난 도심의 빈민 지역을 의미한다. 켄들은 흑인이 많고 빈곤층 비율이 높은 이 지역에서 형성한 자신의 관점을 미국 중산층 백인 중심의 페미니즘과 대비하여 이야기를 풀어간다. ‘흑인성’을 전면에 들이대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장애인, 트랜스젠더 등 ‘주류’에 포함되지 못하는 주변부의 이야기로 확장한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이야기가 어떻게 배제의 논리가 되며 때로는 폭력이 될 수 있는지 들춘다.

“나의 할머니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칭하지 않을 것이다. 백인 여성이 투표권을 쟁취한 이후인 1924년에 태어났지만 짐 크로법(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한 인종차별법)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자라난 할머니는 백인 여성을 동맹이나 자매로 여기지 않았다.” 켄들의 할머니는 성 역할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 어머니나 할머니가 그랬듯이 일을 했다. 하지만 네 딸들에게는 반드시 교육을 받게 했다. “비록 나를 숙녀로 만들기 위해 헛된 노력을 기울이기는 했지만 할머니는 … 내가 아는 가운데 제일가는 페미니스트였다.”

하지만 그는 페미니스트 수사를 경멸했다. 당시 페미니스트들이 할머니 같은 여성들에 대해 늘어놓던 말은 인종주의적이고 계급주의적인 가정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것이다. 백인 여성들의 우선 과제로 정의된 페미니즘은 유색인 여성들을 통해 헐값에 가사노동을 해결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었다. 백인 여성들 대신 주방에 들어가는 것이 흑인 여성에게 자유의 길이 될 수는 없었다.



주류 담론이 ‘유리천장’ 문제를 얘기할 때
주변화된 여성들의 문제는 다뤄지지 않는다




켄들은 여섯 살 때 할아버지 덕분에 목숨을 구한 적이 있다. 미용실에서 나오는 중이었는데, 할아버지는 총싸움이 붙은 두 사람 사이에서 그를 끌어냈다. 그의 앞머리는 총알이 스쳐 둥글게 잘려 있었다. 미국에선 연간 300만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총기폭력에 노출된다. 흑인 아동 및 10대가 총기에 사망할 확률은 백인에 비해 14배나 높다. 여자아이들은 같은 위험에 처해있으면서도 총기폭력에 대항하려는 대부분의 노력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이중고를 겪는다. 특히 “흑인 남성에 비해 흑인 여성은 낯선 사람이 아닌 배우자, 친밀한 지인, 가족에 의해 살해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첫 남편으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한 미키 켄들 자신의 경험이기도 했다.

2012년 레키아 보이드라는 시카고의 흑인 여성은 백인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 그는 귀에 휴대폰을 갖다 대고 있던 남성 옆에 서 있었는데, 경찰은 이 동작을 총을 꺼내는 것으로 오인했다. 레키아 보이드는 머리에 총을 맞아 즉사했고, 휴대폰을 꺼내든 남성은 손에 총을 맞았다. 경찰은 총격 사실을 시인했지만, 단 하루도 복역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근무 중이지도 않았다. 사건 전 그는 공원에서 파티를 벌이던 사람들과 말다툼을 했다고 한다. 시끄럽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인근에 부동산을 소유한, 그 지역에 새로 온 사람이었다.

켄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은 대체로 젊은 백인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젠더에 따른 임금 격차 때문에 백인 여성들은 백인 남성과 부유한 지역의 부동산을 두고 경쟁할 수 없지만, 유색인 공동체의 더 싼 동네에서의 비용은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힙한’ 가게는 ‘침략’이 된다. 동네의 규범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비큐 파티 같은 일상적인 소음에도 경찰을 부른다. 유색인 여성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길모퉁이에서의 잡담은 치안의 위협으로 여겨진다. 경찰이 자주 돌아다니는 곳을 백인들은 안전하다고 느끼겠지만, 유색인 여성들에게는 불안한 폭력을 예감하게 한다. 이어지는 공동체의 파괴는 동네 노인들의 돌봄위기까지 낳는다. “이것이 바로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현실이며, 흑인 여성으로 살아가는 현실이다. 새 이웃을 성가시게 만들면 총에 맞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때 던져야 할 질문은 총기폭력이 페미니즘 이슈인가가 아니다. 왜 주류 페미니즘은 이 문제를 더 다루려 하지 않는가다.”

📌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5년, 혐오를 넘어 ‘확장하는 페미니즘’으로

켄들은 부계 성, 최고경영자가 되는 방법에 대한 토론이 페미니즘 담론의 중심에 서 있는 동안, 주변화된 여성들이 겪는 식품 불안정성, 교육, 의료 서비스 같은 문제가 다뤄지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이를테면 ‘유리천장’을 부수는 평등이 ‘모두’를 위한 길을 열 수 있을까. 백인 페미니즘은 ‘린 인’(lean in·뛰어들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자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의 책 제목으로, 여성들의 리더십을 북돋우는 내용)하여 회사에서의 승진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는 반면, 흑인 여성들은 이름 때문에 고용차별을 겪고 헤어스타일 때문에 해고당하는 문제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2016년 백인 여성 유권자의 53%가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수치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851년 미국 오하이오에서 열린 여성인권대회장 연단에 선 노예 출신의 늙은 흑인 여성 소저너 트루스는 유명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여성은 단일하지 않다. 사회적으로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여성’을 이야기하다 보면, 트랜스 여성이, 장애 여성이, 빈곤층 여성이 간과될 수 있다.

책의 논의는 미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굶주림, 노동, 의료서비스 접근, 교육권 등의 질문은 동시대 한국에도 유효하다.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면서 ‘시스젠더-비장애인-대졸-수도권’에 거주하는 여성만이 상상될 때, 누군가는 지워지게 되는 것이다. 개개인의 젠더, 인종, 계급이 단일하지 않기에 저마다의 차이를 인정하는 ‘교차성’을 이야기하고, 다양한 정체성을 포괄하며 연대하는 페미니즘을 말하는 이유다.

가부장제가 여전히 공고한 현실에서 이러한 비판이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을 켄들도 의식한다. 하지만 “내부에서의 비판이 페미니즘을 성장시키고 더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을 지지하는 데 초점을 두면서 주변부에 선 이들의 경험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흑인 여성의 페미니즘 이야기가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문제의식에 주목한다면 남 얘기로만 읽히진 않는다. 그의 주변부로 향하는 시선을, 정상성에 대한 문제제기들을 가져와 우리의 질문으로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 같다. “후드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모두가 필요로 하기에.”


배문규 기자 sobbell@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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